콜옵션 포기, FI가 11번가 경영권 매각 나설 듯
두산그룹 전례 밟으면…10년 소송에 원금회수 어려울수도
국민연금도 등졌는데, 투자자들 불안감은 증폭
5년간 투자유치만 9조원…회수 방안도 불안
-
투자자와 기업의 거래는 계약서 상에 드러나지 않은 상대방에 대한 신의(信義)가 밑바탕에 깔려있다. 이 같이 신의에 기반한 거래는 가끔 깨지기도 하는데, 최근 SK그룹이 자본시장에 화두를 던졌다.
SK스퀘어는 29일 재무적투자자(FI)가 보유한 지분을 되사오는 콜옵션(주식매수청구권)의 행사를 결국 포기했다. 11번가의 지분 100%의 매각 권한이 FI 손에 넘어갔는데 이는 SK그룹이 11번가의 경영권을 포기했다는 의미와도 일맥상통한다.
SK는 5년 전 재무적투자자(FI)로부터 투자유치를 받으며 기업공개(IPO)를 약속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약속을 이행하지 못했으니 투자금을 돌려줘야하는 상황에 몰리게 됐고 SK는 투자금을 돌려주는 대신 투자자들에게 회사를 매각해 몫을 챙길 것을 주문했다. SK가 보유한 11번가 지분 80%의 지분가치만 약 1조원, 자칫 전액 손실을 기록할 가능성도 있다.
어쩌면 투자자와 기업의 관계에 있어 최악의 시나리오가 등장한 셈이다. 물론 SK도 투자자도 원했던 상황은 아니다. SK 내부에선 지난 5년간 기업가치 하락을 방치한 경영진들의 책임론이 불거질 가능성이 높다. FI도 마찬가지로 사실상의 투자 실패를 인정해야한다.
SK가 보유한 지분을 포함해 동반매도요청권(드래그얼롱)을 행사, 경영권 매각에 나서야하는 FI의 부담은 상당히 크다. 경영권을 쥔 대기업 SK가 아마존·알리바바·큐텐 등 굵직한 원매자들과 협상에 나섰음에도 합의점을 도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FI의 매각 작업도 낙관하기만은 어렵다.
FI 입장에선 과거 SK그룹의 재무상황을 고려해 풋옵션(상환청구권) 대신 드래그얼롱 조항을 선택한 것이 결론적으로 '패착'이었다.
발행사(기업) 입장에선 풋옵션의 경우 투자자들의 투자금이 회계상 자본이 아닌 부채로 계상되기 때문에 다른 방식의 보장 장치를 마련하는 것을 선호한다. 당시 자본시장에서 활용하던 콜옵션과 드래그얼롱의 조합이 최종 투자 조건으로 결정됐는데, 이 조건엔 SK그룹이 계열사의 경영권과 임직원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기본적인 믿음이 깔려있었다.
투자은행(IB) 업계 한 관계자는 "풋옵션을 강제하지 않은 것은 발행사의 부담을 덜기 위한 측면도 있다"며 "(11번가의 경우) SK그룹이 투자자에게 드래그얼롱 권리를 행사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을 것이란 기본적인 신뢰에 기반한 투자였다"고 말했다.
실제로 FI가 드래그얼롱을 행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과거 두산그룹의 사례가 사실상 유일하다.
2011년 두산그룹은 두산인프라코어차이나(DICC)의 상장을 약속하고 투자자들로부터 3800억원(지분 20%)의 투자금을 유치했다. 다만 11번가 사태와 마찬가지로 약속한 DICC 상장을 성사하지 못했고 FI들은 드래그얼롱을 행사해 원매자를 찾아나섰지만 이 또한 실패했다. 이 사건은 결국 소송전으로 비화했다. FI 측은 두산그룹이 경영권 매각에 협조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길고 긴 소송전을 치러야 했다. 투자의 시작부터 대법원 결론이 나기까지 10년이 넘는 기간이 소요됐다.
※ 참고: DICC 소송戰, 8000억 내어줘도 책임질 사람 없는 두산그룹https://www.invest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2/10/2018121086004.html
최초 3800억원을 투자한 FI들이 손에 쥔 건 불과 3000억원이었다. FI는 원금에 지연이자를 포함해 최대 1조원까지 회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결국엔 원금도 건지지 못했다. 10년의 시간에 녹아든 기회비용을 고려하면 상당한 손실을 기록한 셈이다.
두산그룹은 7000억원이 넘는 현금을 아꼈지만 돌이킬 수 없는 평판 리스크를 짊어져야 했다. 한 때는 자본시장과 가장 가까운 그룹사 중 하나였지만 이젠 투자자들이 기피하는 기업이 됐다.
마찬가지로 SK그룹이 FI의 매각 작업에 협조할 지는 미지수다. 두산그룹의 DICC 사례와 달리 SK그룹이 선제적으로 11번가 매각을 추진하면서 '최소한'의 노력을 보였다는 점은 기대해볼만 하다. 하지만 상황에서 따라 소송전으로 비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뿐더러 DICC 사태 같이 FI가 원금을 회수할 수 있을 것이란 보장도 없다.
FI 입장에서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SK보다 훨씬 싼 값에 매각해도 원금과 연 3.5% 수준의 이자를 챙길 순 있다. 마지노선은 약 5500억원~6000억원 수준으로 평가 받는다. 그러나 협상 기간을 장담할 수 없다는게 가장 큰 리스크 중 하나다.
-
현 시점에서 가장 불안한 건 국민연금이다. 국민연금은 11번가에 직·간접적으로 약 3800억원을 투자했다. IPO를 통한 수익률 극대화는 이미 물건너 간 상황. 그나마 최선의 시나리오가 원금에 연 3.5%의 수익률을 보장받는 것이다. 기존의 대체투자 수익률에 비쳐보면 상당히 미미한 숫자다. 이마저 FI가 주도하는 매각과정에서 11번가가 6000억원 이상의 기업가치를 인정받는 것이 전제다.
국민연금은 이미 SK그룹에 대한 익스포저가 한도에 차 있을 정도로 많은 투자를 진행해 왔는데 SK그룹의 리스크가 현실화하면서 내부적으로도 상당히 고민이 깊어졌단 평가다. 원금 회수 가능성과 별개로 약 4000억원에 대한 불확실성을 안고 기약 없이 기다려야하는 점을 고려해야한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국민연금이 앞으로 SK그룹에 대한 투자에 나설지는 더욱 불투명해졌다.
SK그룹은 국내 가장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투자자인 국민연금의 신뢰를 잃었다는 점 만으로도 상당히 큰 리스크를 지게 됐다. 국민연금이 SK그룹에 대한 익스포저를 줄여나간단 것은 직접 투자를 배제하는 것은 물론이고 PEF 및 간접투자가 상당히 제한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SK그룹 계열사의 상당수가 외부투자 유치로 외형을 키워왔는데 향후 투자유치에 제약이 생긴다는 것은 그룹의 경영활동에 어려움을 예상된다는 말과 같다.
이 같은 이유로 "설마 SK가 국민연금을 등지겠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지만, 투자자들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사모펀드(PEF) 업계 한 관계자는 "SK스퀘어의 이사회에서 결론을 내리기 전부터 국민연금에서 상당히 걱정을 많이 했다"며 "국민연금이 PEF 출자, 직접투자 등을 비롯해 상당히 투자금이 많은데 앞으로 회수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국민연금뿐 아니라 SK그룹에 투자한 다수의 투자자들은 이미 불안감을 호소하고 있다. 국민연금의 자금도 돌려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투자자들에게 더 확실한 보장장치를 마련해 줄 것으로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SK그룹이 지난 5년간 외부에서 투자를 유치한 금액은 9조원이 넘는다.
SK그룹 계열사에 투자한 PEF 대표급 관계자는 "(콜옵션 포기의) 파장이 상당히 크고 투자자들에게 상당히 불편한 상황이 조성됐다"며 "다만 그룹의 전략을 비쳐봤을 때 (주력이 아닌) 11번가와 나머지 투자유치를 받은 계열사들은 조금 다르게 접근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사실 이번 11번가 사태를 계기로 SK그룹이 지향하는, 엄밀히 말해 최태원 회장이 '강조'하는 파이낸셜스토리의 부작용도 되집어봐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비주력 자산 정리, 지분활용 투자금 유치, 주주환원 확대 등의 내용이 담긴 파이낸셜스토리의 요점은 성장전략을 제시해 높은 기업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다.
각 계열사 임원들은 지난 수년간 외부투자 유치에 집중했고 이 과정에서 기업가치가 상당히 부풀려지는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는 계열사의 높은 몸 값을 인정받아 그룹 지배구조 최정점에 있는 지주회사의 밸류에이션을 끌어올리기 위한 노력으로도 비쳐지기도 했고, 이 과정에서 인정받는 계열사의 높은 기업가치는 최고경영자(CEO) 및 임직원의 성과와 직결되기도 했다.
아직까진 투자유치의 성과만 두드러져 나타났다. 11번가 사태만 보더라도 투자유치를 주도했던 주요 인사들 가운데 콜옵션 행사와 포기 등 마무리를 책임지는 인물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불과 몇년 전만 하더라도 SK그룹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는 남아있었다. 2019년 SK인천석유화학 IPO에 실패하자 투자금 전액을 돌려줬다. 자본이 넉넉한 것도 아니어서 투자금을 돌려주기 위해 6000억원 규모의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해야했다.
앞으론 지난 4~5년간 SK그룹이 외부에서 투자받은 자금들은 부메랑이 돼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 재차 투자유치에 나선다면 성공여부를 떠나 과거의 밸류에이션을 인정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인 기업들도 다수다.
최근엔 확실하게 실적이 뒷받침하는 기업이 아닌 이상 투자자들에게 높은 밸류에이션을 인정받기란 쉽지 않은게 현실이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SK그룹 내 성장성을 확실하게 담보할 수 있는, 그리고 현재상황에서 적격 요건을 갖추고 IPO에 나설 수 있는 계열사가 사실 많지 않다는 점이 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