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자금 상당부분 차입성 자금으로 조달할 듯
업황 침체 장기화하면 HMM 10兆 현금도 부족
매각 재수 피했지만 해운정책 불확실성은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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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하림그룹이 국내 최대 컨테이너 선사 HMM을 인수한다. 재계 순위를 크게 끌어올리는 한편 해운 전문 기업으로 도약할 발판을 놓게 됐지만 이번에도 ‘승자의 저주’를 우려하는 시선이 적지 않다. 인수자보다 피인수기업의 덩치가 더 큰 데다 HMM의 현금을 활용하기 위해 요구했던 조건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림그룹은 오랜 기간 재무 부담을 져야 하는데 이를 감당하지 못하면 HMM이 다시 위기 상황에 놓이게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지난 18일 산업은행 등은 HMM 매각 우선협상대상자로 하림그룹을 선정했다. 하림그룹의 인수 주체인 팬오션도 이 같은 소식을 알리며 매각 측과 성실한 협상을 통해 본계약을 체결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매각 대상은 HMM 지분 약 57.9%고, 거래 금액은 6조4000억원 수준이다.
하림그룹은 김홍국 회장이 발로 뛰며 HMM 인수 의지를 드러냈고, 지난달 본입찰에서도 가장 높은 금액을 써내 유리한 고지를 잡았다. 그러나 세부 조건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이견이 있었다. HMM의 잔여 영구채를 3년간 주식으로 전환하지 말라는 하림그룹의 요청에 매도자는 난색을 표했고, 동원그룹은 형평성 문제를 제기했다. 결국 하림그룹이 한 발 물러섰고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를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재계순위 27위의 하림그룹이 HMM(19위)을 인수하면 순위를 13위권으로 끌어올리게 된다. 벌크선 위주의 팬오션과 컨테이너 중심의 HMM이 합쳐지면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면서 사업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 선대 확충이나 선박금융을 활용 시에도 협상력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하림그룹은 팬오션 인수 성공 경험을 들어 HMM 경영 성공도 자신하고 있다.
앞으로 재무부담을 어떻게 해소하느냐가 하림그룹의 핵심 과제가 될 전망이다. 당초 HMM 매각 마지노선은 5조원 초반대로 예상됐지만, 이후 주가가 높게 유지되면서 인수자의 부담이 1조원 이상 늘었다.
하림그룹은 HMM 인수전을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금융 시장을 찾았다. 처음부터 사모펀드(PEF) 운용사 JKL파트너스와 손을 잡았고, 시중은행과 대형 증권사들을 접촉해 3조4000억원 수준의 인수금융 확약서(LOC)를 확보했다. 팬오션은 호반그룹 대상으로 5000억원 규모 영구채를 발행하고, 유상증자도 진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외에 팬오션은 한진칼 지분을 처분해 1628억원을 조달했고, 선박 매각 등으로 추가 자금도 확보할 예정이다.
표면적으로는 인수자금이 충분하지만 상당 부분이 차입성 자금인만큼 상환 부담도 크다. 고금리 상황에서 수조원의 차입금을 일으켜야 하고, 그보다 높은 금리로 재무적투자자(FI)를 초빙해야 한다. 하림그룹은 차입을 최소화하고 증자 등으로 일부 부담을 시장에 전가한다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해운업 침체기에 그룹보다 더 큰 해운사를 인수한다는 압박은 작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림그룹이 매도자 측에 △3년간 영구채 주식 전환 유예 △FI 지분 5년 내 매각 허용 △HMM 자사주 매입 등 조건을 요구했던 것도 이런 재무부담 때문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매도자는 향후 3년간 HMM 배당을 연 5000억원으로 제한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영구채가 주식으로 전환되면 하림그룹의 HMM 지분율은 57.9%에서 38.9%까지 떨어지고, 하림그룹 측은 매년 1000억원의 배당금을 덜 받게 된다.
HMM에 가용 현금 10조원이 쌓여있지만 이제 해운업황 침체의 초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함부로 쓸 상황도 아니다. 다음 호황 주기까지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 동안 쌓일 손실, 선박 확대 및 사업 다각화 비용 등을 감안하면 살림살이가 빠듯하다. 3년간 배당에 들어갈 1조5000억원은 고정 부담이다.
하림그룹의 HMM 인수를 불안하게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팬오션 인수 성공 경험은 높이 칠 만하지만 HMM은 아예 체급이 다르다. 금융사 사이에선 일감을 따낸 것은 다행이라면서도 앞으로가 걱정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돈을 떼일 가능성은 차치하고라도 당장 재매각(sell down)부터 걱정이다. 기관투자가(LP)들의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 LP 관계자는 “HMM 인수 시 차입 부담, 꺾이는 해운 업황, 하림그룹의 덩치 등을 불안 요소가 적지 않다”며 “웬만한 수익 보장과 안전장치가 아니고는 하림그룹의 HMM 인수에 힘을 보태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HMM 매각은 산업은행 주도 거래로는 드물게 첫 시도에 성사될 가능성이 커졌다. 다만 여러 불안과 논란을 안고 매각을 강행하는 것보다는 차후 재무안정성이 담보된 대기업이 나타날 때를 기다리며 ‘재수’를 하는 것이 낫다는 시각도 적지 않았다.
하림그룹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를 재무부담을 감당하지 못하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극단적으로는 산업은행이 다시 총대를 메게 되거나, 견제 장치가 사라진 하림그룹이 필요에 따라 HMM 지분을 활용할 가능성도 있다. 어느 경우든 국가 해운정책에는 큰 충격파가 미치게 된다. 해양수산부를 중심으로 이런 우려가 제기됐지만 금융위원회와 기획재정부, 산업은행의 생각을 돌리긴 어려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 해운업계 전문가는 “자기자본 조달 규모가 크지 않은 기업이 HMM을 사가면 해운정책을 펴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해양수산부의 목소리는 중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해운업황이 좋아지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하림그룹 전체가 흔들리고 이후 HMM의 항로도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