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강조로 시작해 '성과' 요구로 마무리된 신년사
지정학·금리 등 거시 변수 불확실성 가득한 '2024년'
CJ·SK·롯데 이후 이어지는 그룹사 자금소요·조달 카드
AI發 산업 지형 변화 이제 시작…삼성·현대차도 맞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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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올해 재계 신년사는 불안감으로 시작해 자산 효율화, 성과 주문으로 채워졌다. 코로나 이후 경제 불확실성이 높아지며 이로 인한 위기를 기회로 삼자는 메시지는 매해 반복됐지만 올해는 각국 선거부터 지정학 분쟁까지 통제 불가한 변수가 누적적으로 늘어난다. 인공지능(AI) 기술까지 기존 산업 지형을 뒤엎고 있다. 자산 매각이건 신사업 투자건 때를 늦췄다가 주력 사업의 고삐를 내줄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어느 때보다 팽팽하단 평이 나온다.
연초 국내 그룹 총수들은 ▲사상 초유의 위기 (CJ) ▲초불확실성의 시대(롯데) ▲경기 침체의 시작(GS) ▲엄혹한 현실(신세계) ▲열악한 경영환경(한화) 등 위기감을 잔뜩 드러내며 신년사를 시작했다. 이어 위기를 기회로 삼자는 통상적 주문을 내놨지만, 각론 차원에서도 사업 구조를 과감히 개편하되 신사업에서 확실한 성과를 내달라는 요구가 공통적으로 담겼다.
실제로 거시 경제 불확실성은 크게 높아지고 있다. 지난 연말 14개월 만에 수출이 반등했다지만 수에즈 운하는 이스라엘 분쟁으로, 파나마 운하는 가뭄으로 병목을 일으키고 유가와 해상운임을 일시 밀어올리고 있다. 해상 무역 양대 관문이 각각 지정학·기후 위기로 막힌 셈인데, 올해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는 어느 한쪽 문제에 기름을 끼얹을 수 있다. 기업 입장에선 둘 모두 '비용이 오른다'는 얘기로 통한다.
미국의 대중국·러시아 견제와 친환경·신재생 에너지 전환 정책에 올라탄 국내 기업 입장에선 비용은 비용대로 치르며 약속받은 지원을 끌어내지 못할 위험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반도체와 전기차, 2차전지, 태양광 등 핵심 사업의 현지 증설은 미국 정부의 보조금 변수에 따라 셈산이 널 뛸 수밖에 없다. 단위 투자비가 가장 높은 나라에 공장을 지으며 공급망까지 교체해 온 터에 보조금이 빠지면 적자가 예상되는 사업도 일찌감치 거론된다.
지난 연말 부풀기 시작한 시장금리 인하 기대감은 연초부터 바람이 빠지고 있다. 금융권에선 작년과 마찬가지로 금리 인하 시점이 또 반년에서 일년씩 밀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건설 계열을 보유한 그룹 입장에선 태영건설의 워크아웃 위험이 전이될까 살얼음판이 펼쳐져 있다.
이 같은 위기감에 대한 해법은 사업 구조 개편이나 자산 효율화 등 구체적 문구로 신년사에 담겼다. 사실상 비주력 자산의 매각을 통한 현금 확보, 재무개선 계획의 예고편으로 받아들여진다.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이미 작년부터 국내 대기업은 인수합병(M&A) 시장에서 사는 쪽이 아니라 파는 쪽으로 선회했다"라며 "올해 대기업의 자산 매각, 유동화가 한층 더 속도를 낼 전망이다 보니 이미 자문 시장에선 잠재 매물부터 각 기업 유동화 계획 윤곽을 짜보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지난해 신용평가사들은 CJ와 롯데, SK그룹을 콕 집어 우려를 표했고, 이들을 중심으로 자산 매각 외 증자, 메자닌, 사모대출까지 가능한 모든 방식의 조달 카드가 등장했다. 그러나 이들의 재무구조 개선 작업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가운데 신세계나 효성 외 삼성·LG그룹까지 전방위 조달 전선에 뛰어들 가능성이 높다.
반도체가 회복세를 보이고 있지만 매년 수십조원에 달하는 투자비를 감당하기까진 시일이 필요하다. 전기차와 2차전지 시장은 물론 태양광과 신재생에너지 발전 사업 역시 미국 선거 결과에 따라 현금흐름 불안이 급격히 높아질 거란 우려가 많다. 결국 돈이 안 되고 사고가 많은 사업을 줄이거나 일부 지분을 매각하는 식으로 주력 사업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버틸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는 얘기다.
증권사 한 연구원은 "LG화학의 경우 신학철 부회장이 '실행의 해'라는 신년사를 내놨는데, 업계에선 NCC나 자회사 지분 매각 등 작년에 추진하지 못한 유동화 계획을 가리키는 것으로 풀이된다"라며 "현대차·한화그룹 역시 미 증설 문제로 선거 결과를 예의주시하고 있고 삼성전자가 올해 파운드리 투자비를 어떻게 마련할지도 주목을 받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재무 측면뿐 아니라 신사업에서의 성과 역시 절실하다. 글로벌 빅테크들은 올해 중 AI 시장 승기를 잡기 위해 승부수를 던지기 시작했다. 관련 업계에선 올해부터 본격화 할 AI 기술발 파고가 테크 산업에 머물지 않고 국내 대기업 기존 주력 산업의 근본적인 경쟁 구도를 뒤바꿀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작년 이후 그간 경쟁 구도를 청산하고 맞손을 잡기 시작한 삼성과 현대차그룹의 행보도 이를 뒷받침하는 사례로 꼽힌다. 현대차그룹의 모빌리티나 삼성그룹의 반도체·전자기기 생태계 모두 지난 수년 소프트웨어(SW) 역량 확보에서 글로벌 경쟁사 대비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는데, AI 이후 격차가 승수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업계 한 관계자는 "AI 산업의 시장 침투를 앞두고 국내 그룹사 위기감이 전과 달라진 것이 사실"이라며 "삼성은 물론 현대차, LG그룹까지 주요 그룹사가 AI 시장 본격화 이후 먹거리에 대한 고민이 많아졌다. 올해 춘추전국을 거치며 기존 주력이던 본업 영향력이 줄어들 가능성에 대해 고민이 많아진 상황"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