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 매각 번복, 은퇴도 번복
대규모 M&A 추진 발표 1년만, 또 뒤바뀐 기조
홀딩스 IPO로 재원마련, 100조 펀드 조성 계획
현실성 떨어지는 오너, 무게감 없는 발언들
투자자들은 언제까지 용인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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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진 셀트리온그룹 회장이 이번엔 '100조 펀드 조성'을 내세웠다. 잊혀질만 할 때쯤 투자자들에게 그럴싸한 화두(Agenda)를 던지는 전형적인 서 회장의 기업가치 띄우기 전략이다.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일은 기업의 오너로서 당연한 역할이지만 제시된 비전이 현실화하는 일은 서 회장만의 과제가 아니다. 오너와 임직원들이 실현가능한 비전에 공감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들이 수반돼야만 오너의 비전에 무게가 실린다.
이제까지 비쳐진 모습만 본다면 서 회장 발언의 대부분은 공언(空言) 에 가까웠다. 서 회장의 발표는 충격적이고 또 자극적이었지만 이목을 끈만큼 성과를 내거나 실행에 옮겨진 사례는 많지 않았다.
"공매도에 질렸다. 주식 다 팔겠다. 절대 번복하지 않겠다"(2013년)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서 회장은 공매도에 질렸다며 보유 주식을 모두 매각하겠다고 했다. 현재 서 회장은 여전히 셀트리온을 지배하는 셀트리온홀딩스의 지분 97%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서 회장은 늘 공매도를 기업가치를 억누르는 요인으로 설명해 왔지만, 셀트리온 계열사들의 주가는 사업적으로나 재무적으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아왔다는게 중론이다. 공매도보단 오히려 불투명했던 셀트리온 사업 및 매출구조 이를 통한 높지 않은 투자자들의 신뢰도가 주가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풀이된다. 사실 공매도가 전면 금지 이후 셀트리온이 가장 큰 수혜를 봤는가를 따져보면, 또 그렇지만도 않다.
"임상 결과를 보면 4~5일이면 몸안의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다 사멸된다" (2020년)
발언 그대로 본다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셀트리온이 밝힌대로 '경증 환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임상 1상 내용에 불과했지만 코로나가 창궐하던 당시엔 셀트리온의 코로나 치료제가 마치 코로나를 종식할 '빛'처럼 여겨졌고 이로 인해 셀트리온과 헬스케어 등 관련 기업들의 기업가치가 급등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물론 추후 셀트리온이 치료제 렉키로나주를 시장에 선보였고 실제로 사용승인을 획득했지만 게임체인저로서 부각하진 못했다.
서 회장은 2020년 "의료 스타트업을 세워 창업가로 돌아가겠다"며 은퇴를 선언했다.
당시 '아름다운 퇴장'이란 찬사를 받으며 은퇴를 선언한 서 회장은 불과 2년만에 복귀했다. "환경에 변화가 생길 경우 소방수 역할로 돌아오겠다"는 말은 지킬 수 있게 됐다.
서 회장은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겠다는 경영철학을 늘 내세워 왔다.
최근 서 회장의 장남 서진석 이사회 공동의장은 합병 법인 출범 직후 각자 대표로 선임됐다. 올해 JP모건 헬스케어컨퍼런스에서 서정진 회장과 서진석 대표는 나란히 무대에 섰다. 서 회장의 동생인 서정수 셀트리온제약대표는 부회장으로 승진했고, 차남 서준석 씨는 셀트리온 미국법인 CEO 겸 캐나다법인장이다.
"대규모 M&A를 추진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준비해 왔다. 4~5조원 자금을 마련해 오는 3분기쯤 집행할 계획이다"(2023년)
서 회장이 대규모 M&A 계획을 발표하자 투자자들의 기대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실제로 미국 박스터인터내셔널의 CMO 사업부 인수를 검토하고 있단 발표도 있었지만, 무산됐고 아직까지도 M&A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최근 서 회장은 JP모건 컨퍼런스에서 "바이오 기업의 재산은 그 회사의 인재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일할 수 있도록 하는게 중요하다"며 "회사를 사는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불과 1년도 채 되지 않아 기조가 180도 달라진 셈이다.
서 회장은 컨퍼런스에서 셀트리온홀딩스의 기업공개(IPO), 이를 통해 마련한 자금으로 "100조원 규모 헬스케어 펀드를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서 회장이 셀트리온홀딩스 IPO 계획을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해당 작업이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지, 내부적으로 충분한 검토가 이뤄졌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셀트리온홀딩스 IPO는 추후 중복상장 이슈 등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힐 가능성이 높다. 자회사 주주들의 반발도 예상해 볼 수 있다.
상장이 완료하면 단일 주주인 서 회장이 오롯이 그 수혜를 누리게 된다. 시장상황에 따라 그리고 지주회사로서 여러가지 디스카운트 요인들이 발생하면 서 회장이 원하는 기업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서 회장이 밝힌 100조펀드 재원 마련의 시작점은 홀딩스의 IPO이다. IPO 계획이 차질이 생긴다면 펀드 조성도 쉽지 않다는 의미다.
상장에 성공해 자기자금을 투입해 100조의 펀드를 구성하겠단 계획은 매력적이지만, 현실성은 따져봐야 한다.
투자만을 목적으로 수 년째 전세계 투자처를 찾아나서는 소프트뱅크의 비전펀드의 절반을 훌쩍 뛰어넘는 규모이자, 아시아 최대 규모 사모펀드(PEF) MBK파트너스의 운용자산(AUM)을 가뿐히 넘는 펀드를 조성하는 것은 개인의 구상만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90조원이 넘는 자금을 모으는 일이 과연 서정진이란 이름 세 글자로 가능할지도 미지수다.
어느새 덩치가 커진 셀트리온은 국제무대에서도 주목받는 제약사로 변모하고 있지만, 이를 이끄는 수장은 그 규모에 걸맞는 무게감과 품격을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을 대표하는 제약기업 수장의 가벼운 발언들이 자칫 국내 제약회사를 바라보는 외국인들의 시선과 결부될까 우려가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투자 경험도, 인력과 조직 그리고 시스템과 전략 등 어느하나 갖춘게 없는 오너의 내실 없는 발언들은 그 기업의 신뢰도와 직결된다. 개인적인 거취의 문제든, 그룹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대규모 투자든 편의에 의해서 말을 바꾸는 기업의 수장을 투자자들은 언제까지 바라봐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