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R서 드러난 자신감…"AI, 물량보단 고객 필요 핵심"
삼성전자, 신중한 전망에도…전 사업부 AI에 '사활'
HBM 구체적 성적표 공유…하반기 90% 수준 전망
"양사 분위기 뒤바뀐 듯"…시선 연말 AI 성적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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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간 실적발표회(IR)에서 SK하이닉스는 자신감이 가득했고 삼성전자는 와신상담을 예고하는 듯했다. 반도체 업황이 최악으로 치달았던 지난해 SK하이닉스가 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을 선점하며 삼성전자에 완승을 거둔 데 따른 이례적 장면이다. 그간 시장에선 AI 반도체 경쟁에서 삼성전자의 오랜 1등 DNA가 독으로, SK하이닉스의 절박한 영업력이 약으로 작용했단 관전평을 내놨었다. 이제 시선은 양사 최근 IR에서 드러난 뒤바뀐 분위기가 올 연말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로 옮겨가고 있다.
31일 삼성전자는 4분기 연결기준 매출액이 67조7799억원, 영업이익이 2조8247억원으로 집계됐다고 발표했다. 이번 분기 반도체(DS) 부문 매출액은 21조6900억원, 영업적자는 2조1800억원으로 나타났다. D램은 흑자로 돌아섰지만 업계 감산 기조에 뒤늦게 동참한 터라 낸드 손익은 경쟁사보다 개선이 더뎌 메모리 반도체 전체로는 적자를 이어갔다.
3분기 D램 흑자 전환에 이어 4분기 시장 예상을 뛰어넘고 3000억원 규모 영업흑자를 달성한 SK하이닉스의 완승이다. SK하이닉스는 2개 분기 연속으로 D램 수익성에서 삼성전자를 앞질렀다. 처음 있는 일이다. 반도체 업계 내에서도 엔비디아향 HBM3 공급 성적 외 DDR5 등 고부가가치 D램에서 삼성전자 기술력이 뒤지는 상황을 신선하게 바라보는 분위기가 짙다.
반도체 업계에선 AI 반도체 시장 개화기 만년 1위 삼성전자와 추격자 SK하이닉스의 서로 다른 DNA가 이 같은 상황을 빚어낸 것으로 보고 있다.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AI 반도체 시장 들어 메모리가 완전히 고객 맞춤형, 수주형 산업으로 바뀌고 있는데, 이 지점에서 영업력으로 승부를 봐야 했던 2등 SK하이닉스가 삼성을 앞지를 수 있었던 것"이라며 "왕좌에 있던 삼성전자가 비용 효율을 이유로 방기한 프로젝트가 SK하이닉스 HBM 수주의 핵심 인력으로 흡수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거론된다"라고 설명했다.
뒤바뀐 입지는 지난 25일 SK하이닉스의 자신감으로 드러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지난 하반기 이후 AI 반도체 선도 업체임을 강조하며 HBM3 및 차세대 제품에서의 수주 경쟁력 우위를 지속 강조해 왔다. AI 반도체 경쟁력은 지난 수십년 이어진 메모리 산업과 달리 물량 기반 점유율 싸움보단 고객이 필요로 하는 가치를 적기 충족하는 데 있다는 얘기다. 투자가 사이에선 메모리 산업에서 그간 삼성전자가 보여준 원가·점유율 기반 경쟁우위가 깨지고 있다는 대목으로 받아들여졌다.
31일 진행된 삼성전자의 연간 실적발표 IR 분위기는 달랐다. 실적이 시장 전망치를 밑돈 것은 물론 D램 수익성도 SK하이닉스(약 21% 추정)에 계속 뒤지고 있는 데다 올해 시장 전망에 대해서도 다소 신중한 시각을 내놨다. 메모리를 포함한 사업부 전반이 불확실한 거시 환경을 감안하되 기술 리더십과 수익성 제고에 주력하겠다는 수준 입장을 반복했다.
반면 AI 반도체를 포함해 전사 차원에서 AI 산업에 대한 초기 시장 선점 의지를 강력하게 피력한 점이 눈에 띈다.
이날 삼성전자는 HBM 경쟁에 대한 한 투자가 질문에 구체적인 수치도 처음 공개했다. 비트 단위 HBM 공급량은 매 분기 기록을 경신 중인데, 4분기엔 전 분기 대비 40% 이상, 전년 동기보단 350% 수준 성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상반기 중 D램 판매수량에서 HBM과 같은 선단공정 제품 비중이 절반을 넘겨, 하반기엔 90% 수준에 도달할 것이라 예고했다.
증권사 반도체 담당 한 연구원은 "매출액이 아닌 판매 수량을 기준으로 내세운 데다 HBM 외 DDR5 등 선단 제품 전체를 포함한 수치인지 아직 불명확하지만 SK하이닉스를 겨냥한 와신상담으로 보인다"라며 "실제로 시장에서도 엔비디아 외 HBM 고객사가 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간 선두 경쟁이 어떻게 바뀔지 관심이 큰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 밖에 파운드리와 시스템LSI 등 비메모리 사업과 갤럭시 시리즈를 포함한 MX 부문에서도 AI에 대한 언급이 주를 이뤘다. SK하이닉스 등 순수 메모리 중심 경쟁사와는 달리 종합 전자기업인 삼성전자만이 갖추고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시장 초입에서부터 'AI 기기=삼성전자'라는 입지를 굳힌다는 계획이다.
구체적으로는 갤럭시 시리즈를 포함한 삼성전자 기기 생태계 전반에 AI 기능을 탑재해 부품, 세트부터 서비스까지 선순환 구조를 구축하는 전략이 공유됐다. 지난해 엔비디아, SK하이닉스가 독점적 지위를 구축한 서버용 AI 반도체 시장과는 달리 아직 1등이 없는 온디바이스 AI 반도체·서비스 시장을 겨냥한 것으로 풀이된다.
수일 간격으로 진행된 양사 IR 이후로 시장 시선은 올해 AI 반도체 경쟁 성적표로 이동할 전망이다. 이미 집계가 마무리된 작년을 기준으로 SK하이닉스가 완승을 거두긴 했지만, 시장 변화가 예상보다 빠른 가운데 삼성전자도 절치부심하는 분위기가 감지되기 때문이다.
투자 업계 한 관계자는 "삼성은 지난해 초부터 전방위 컨설팅을 받으며 연구개발(R&D) 비용을 쏟아부었는데 연초 갤럭시S24 시리즈를 시작으로 사업부 전반이 AI에 사활을 거는 모습"이라며 "캐시카우인 D램이 AI 시장에서 후발에 밀린 뒤 오히려 삼성전자가 절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연말에 누가 웃게 될지 관심이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