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넘는 기관이 밴드 상단 초과…경쟁률 663대 1
공모주 배정 주관사 재량…높은 가격·AUM 크면 유리
"공모가 밴드 제 역할 못해"…운용사 내부서도 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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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올해 첫 유가증권시장 상장을 앞두고 있는 에이피알 공모주 청약에서 국내 대표 기관투자가인 국민연금공단은 한 주도 배정을 받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에이피알 공모는 물량 확보가 곧 수익으로 이어진다는 기대감에 운용사들간의 수요예측 눈치싸움이 치열했다. 공모가 밴드 상단을 초과한 가격에 주문이 몰리며, 공모가 밴드 상단을 초과해 주문을 넣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국민연금이 후순위로 밀린 것이다.
'단타'를 목적으로 하는 기관에 밀려 장기투자기관인 국민연금이 물량을 배정받지 못한 것을 두고, 공모희망가 밴드 제도가 유명무실해진 것 아니냔 비판이 나온다.
20일 운용업계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에이피알 수요예측에서 밴드 상단의 가격으로 주문을 넣었지만, 한 주도 배정받지 못했다. 밴드상단을 초과해 주문을 넣은 운용사 등 타 기관에 밀린 탓이다. 에이피알은 지난 2일부터 8일까지 수요예측을 진행했는데, 663대 1이란 높은 경쟁률을 기록하며 기관의 높은 관심을 받은 바 있다.
당시 에이피알은 희망 공모가 밴드로 14만7000원~20만원을 제시했는데, 전체 1969건의 주문 중 97%가 넘는 1913건이 밴드상단을 초과해 들어왔다. 구체적으로 23만원~25만원이 전체 수량의 56.93%로 가장 많았고, 25만원~27만원이 32.50%로 뒤를 이었다. 27만원을 초과한 주문의 비율도 4.27%에 달했다. 에이피알의 최종 공모가는 25만원으로 결정됐다.
공모주의 배정은 상장 주관사 재량에 달려있어 정해진 기준은 없다. 다만 당국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수요예측 첫날 주문을 넣은 기관에 가점을 주는 '초일가점'이 존재한다. 이 외에는 높은 가격을 써내고, 운용사의 운용자산(AUM) 규모가 클수록 더 많은 물량을 배정받는 것으로 알려진다.
상단을 초과해 주문을 넣은 기관의 비율이 97%가 넘는 상황에서, 상단이라 하더라도 공모가 밴드 내에서 주문을 넣은 국민연금이 물량을 배정받기란 불가능하단 분석이다.
한 자산운용사 운용역은 "국민연금이 이번에 에이피알 수요예측에 들어왔지만 물량을 한 주도 배정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업계에서도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며 "밴드 상단을 초과해 주문을 넣어 물량을 배정받았다가 주가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국정감사 등에서 시장 질서를 교란했단 이유로 질타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공모가 밴드 제도는 주관사와 상장사가 회사의 적정 밸류에이션을 산정해 희망 공모가를 밴드 형태로 제시하고, 기관투자자들이 시장 눈높이에 맞춰 적정 가격에 주문을 넣어 최종 공모가를 확정하는 구조다. 1차로 주관사가 산정한 밸류에이션이 적합한지 2차로 수요예측을 통해 검증하는 것이 제도의 취지다.
다만 최근 공모주 시장의 과열로 기관들이 밴드 상단을 초과해 주문을 넣는 일이 일반화되면서, 이러한 공모가 밴드 제도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올해 기상장사를 포함해 수요예측을 진행한 모든 회사들의 공모가가 밴드 상단을 초과해 확정되기도 했다.
특히 이번 에이피알 수요예측에서 실제수요를 바탕으로 밴드 상단가격에 참여한 국민연금은 공모주를 배정받지 못하고, 상장 첫날 시세차익을 노린 기관들은 물량을 배정받으면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패시브 운용을 하는 국민연금 입장에선 에이피알과 같은 조단위 유가증권시장 상장사의 공모주 물량을 배정받지 못하면 장기적으로도 부담이 크다. 국민연금은 현재 코스피200 벤치마크(BM)를 추종하는데, 에이피알과 같은 공모주가 상장 첫날 400%까지 급등하면 해당 종목을 높은 가격에 매수하는 것이 불기피하단 설명이다.
다른 운용사 관계자는 "운용사 입장에선 수익을 위해 높은 가격에 주문을 넣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시장 전체를 두고 볼 때 지금의 공모시장이 긍정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며 "운용사 내부에서도 공모가 밴드 제도가 제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