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 분분했으나…부진 이어지며 재원 문제로 귀결
줄어든 적 없던 투자…HBM 등장하며 선순환 깨져
"상징적 장면"…현금 줄어드는 가보지 않은 길 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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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가 ASML 지분 전량을 매각했다. 원래였다면 사업 전략 변화를 두고 해석이 분분했겠으나 돈이 필요하다는 단일한 목소리가 나온다. 삼성전자가 재원을 마련하려 투자사 지분을 정리한다는 소식 자체가 낯설다는 반응이 많다. ASML과의 연결고리는 반도체 기업의 주요한 전략 자원이기도 하다. 시장에선 삼성전자가 가보지 않은 길에 들어섰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삼성전자는 2012년 차세대 노광기 개발 협력을 위해 7000억원을 들여 ASML 지분 3%를 확보했다. 10nm 이하 미세 공정 진입을 앞두고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 양산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장비 업체와 지분으로 관계를 맺은 것이다. 2016년 보유 지분 절반을 매각하긴 했지만 이듬해부터 삼성전자는 TSMC와 함께 최대 고객사로 자리를 잡는다.
나머지 지분을 매각하기 시작한 건 지난해 2분기부터다. 삼성전자는 2분기와 3분기에 걸쳐 ASML 지분을 각각 2조원, 1조3000억원에 매각하고 4분기 잔여분 모두를 정리했다.
투자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 외에도 여러 해석이 나왔다. 파운드리·메모리를 가리지 않고 첨단 패키징 역량이 핵심 경쟁력으로 부상하자 EUV 장비가 필요한 전공정 대신 후공정에 무게를 싣기 위한 행보라는 시각도 있었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경쟁사보다 미세하게 회로를 새기기 위한 전공정 투자에 집중해왔다.
그러나 하반기 들어 고대역폭메모리(HBM) 대응과 낸드 감산 시점에 따라 경쟁사가 삼성전자보다 먼저 실적 회복에 들어서자 결국 자금 문제 때문으로 시각이 좁혀졌다. 3분기 SK하이닉스가 가장 먼저 D램 흑자로 돌아섰고 삼성전자는 낸드에서 -50% 수준의 적자를 기록했다. 유례없는 상황들이 한꺼번에 일어나며 삼성전자는 지난해 반도체부문에서 최악의 성적표를 기록했다.
반도체업계 한 관계자는 "HBM으로 인한 D램 부문 충격에 가려져 있지만 삼성전자는 물론 경쟁사까지도 낸드에서 이만한 적자가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라며 "낸드의 경우 경쟁사 모두 적자를 봐도 삼성전자만큼은 홀로 흑자를 내던 영역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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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의 그간 반도체 투자 내역과 현금흐름을 살펴보면 ASML 지분을 매각한 이유가 좀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삼성전자는 지난 2019년 이후 반도체 투자를 줄인 적이 없다. 파운드리 선단공정 경쟁까지 가세하며 2020년 40조원을 넘긴 반도체 투자는 지난 2년 역대 최대치인 50조원 턱밑까지 치솟았다. 불과 1~2년 전까지만 해도 반도체 업계에선 부담을 느끼면서도 삼성전자만 감당할 수 있는 전략이라 수긍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생산능력·원가·공정 경쟁력·자본력·시장점유율 모두 1위인 삼성전자는 공급을 늘려 수익성을 양보하더라도 다음 사이클에선 더 강력한 입지를 구축하는 식으로 보상을 챙겨왔다.
그러나 HBM을 시작으로 메모리 반도체가 범용 제품 틀을 벗어나자 이 같은 선순환 구도가 처음으로 깨졌다. 공장을 잔뜩 지어놨는데 물건은 안 팔리고 재고는 늘어가는 가운데 경쟁사가 주문 제작한 제품만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지난 2년간 투입한 100조원을 회수할 길이 막막해진 상황이란 평이 많다.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최근 외국계 투자사에서 내놓은 메모리 반도체 산업 보고서 부제가 '반-주문제작·비(非) 범용상품'였는데 삼성전자는 분석 대상에서 제외됐다"라며 "쉽게 풀어 설명하면 빈 땅에 농사를 지은 상황이란 얘기"라고 전했다.
이 기간 삼성전자 보유 현금은 30조원 이상 줄어들었다. 2021년 연말 124조2100억원이던 현금은 지난 연말 92조4200억원으로 집계됐다. 이 중 대부분은 미국·중국 등 해외법인과 주요 자회사에 분산돼 있다. 별도 기준 실제로 보유한 자금은 지난 4분기 말 약 6조원 규모로 추정된다. 투자자들이 갈수록 쌓여가는 현금을 문제 삼던 시절과 비교하면 이 역시 무척 이례적인 상황이다.
범용 메모리 반도체 시장 역시 정상화를 앞두고 있다. 인공지능(AI) 산업을 향한 자금이 당장은 HBM과 같은 주문형 반도체에만 몰리고 있지만 이어서 삼성전자가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D램과 낸드 차례가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삼성전자가 수년 내 종전 수준 수익성을 회복할 것이라 전망도 적지 않다.
그러나 구체적인 업황 정상화 시점을 점치기는 쉽지 않다. DDR5 교체기에 들어간 D램의 경우 고객사 차원에서 삼성전자를 포함한 공급 3사의 순위를 다시 따져보는 구간으로 파악된다. 삼성전자의 시장 지위 변동까지 감안하면 지난 수년간 과감한 투자를 단행했는데 이를 회수하는 시기가 얼마나 길어질지 알기 어렵다는 얘기다.
증권사 반도체 담당 한 연구원은 "삼성전자의 ASML 투자 지분에 대한 차익 실현은 투자비 마련에서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상징적 장면으로 보인다"라며 "삼성전자로선 쌓이기만 하던 현금이 줄어드는, 가보지 않은 길로 들어서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