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회 구성 변화無…그룹 대관 강화 기조는 뚜렷
경영 승계 앞둔 TSMC와 대비…사외이사 면면 주목
단순 비교 어렵지만 거버넌스 왜곡·안일한 인식 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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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가 무난하게 정기 주주총회를 마무리 지으며 이사회 구성을 마쳤다. 이재용 회장은 이사회에 합류하지 않았고, 전직 관료와 로봇 전문가가 새 사외이사로 선임됐다. 주목할 만한 변화는 보이지 않고 거버넌스 왜곡은 그대로 두었다는 평이 나온다. 올해 세 번째 경영 승계를 앞둔 TSMC 이사회 구성과 비교하는 목소리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지난 20일 삼성전자는 주총을 열고 사외이사 2명을 교체했다. 김선욱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와 김종훈 키스위모바일 회장이 자리를 비우며 후임으로 신제윤 전 금융위원장과 조혜경 전 한국로봇학회 회장이 새로 선임됐다. 신규 사외이사 선임안을 포함해 이날 상정된 모든 안건은 참석 주주 찬성률 90% 이상으로 통과됐다. 이 회장이 불법합병·회계부정 1심 무죄 선고에도 등기임원 등재를 추진하지 않으며 예상대로 무탈한 주총을 치른 것으로 보인다.
외견상 로봇 전문가가 합류하며 이사회 구성이 다채로워진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변화도 추진하지 않은 주총으로 풀이된다. 로봇 분야 전문성을 내세워 이사회에 합류한 조혜경 사외이사를 제외하면 올해 삼성전자를 포함해 그룹 신규 사외이사 전원이 금융위·검찰·국책은행·국토교통부·통계청·산업통상자원부 등 전직 관료 출신으로 채워졌다. 이 회장 사법 리스크는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삼성그룹 이사회 구성에서 대관과 전관예우 기조가 전보다 더 노골적이게 됐다는 지적마저 나온다.
삼성전자의 최대 경쟁사인 대만 TSMC의 이사회 구성도 덩달아 주목을 받고 있다.
TSMC는 지난 연말 류더인(마크 리우) 회장이 올해 주총 이후 은퇴한다고 밝힌 뒤 웨이 저자(C.C. 웨이) 최고경영자(CEO) 겸 부회장으로 경영 승계를 앞두고 있다. 웨이 저자 CEO는 텍사스인스트루먼트, ST마이크로, 차터드 반도체(현 글로벌파운드리)를 거쳐 1998년 TSMC에 합류한 반도체 전문가로 오는 6월 류더인 회장이 퇴진하면 모리스 창 창업자를 잇는 3대 회장으로 올라 설 예정이다.
TSMC 이사회는 10명으로 구성된다. 류더인 현 이사회 의장(회장)과 쿵밍신 대만 국가발전협의회(NDC) 장관, 정판정 전 부회장 두 명의 이사 외 사내이사는 CEO이자 차기 회장인 웨이 저자 1명이다.
주목할 점은 6명의 사외이사 면면이다. 피터 본필드 전 BT그룹 CEO·마이클 스플린터 전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 CEO·모쉬 가브리엘로브 전 자일링스 CEO·얀시 하이 전 델타일렉트론 이사회 의장·라펠 리프 전 MIT대 총장 등이다. 대만 내각 출신 법률 전문가 1명을 제외한 모두가 글로벌 반도체 전문가·석학으로 채워져 있다. 이들이 마크 리우 현 의장이나 웨이 저자 CEO의 TSMC 경영을 자문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맡는 구조다.
종합반도체 기업이자 반도체 외 포트폴리오 사업을 여럿 보유한 삼성전자 이사회를 순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기업인 TSMC와 단순 비교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러나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전자가 TSMC의 유일한 대안이자 1위 메모리 반도체 기업으로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사회 구성에서 상당한 이질감이 느껴진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실제로 기관투자가들은 그간 삼성전자의 이사회 구성이 글로벌 표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지적을 수차례 제기해 왔다.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삼성전자의 사외이사진이 순수 파운드리 업체에 비해 복잡한 사업 구조를 반영하기 위한 최적의 구성이냐 하면 사실 그것도 아니라는 게 핵심"이라며 "이번 주총에서도 이 회장은 여전히 미등기 임원으로 남으면서 관료 출신을 새 사외이사로 앉혔으니 총수 보신을 위한 이사회 구성이란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전과 다를 바 없는 사외이사 구성뿐 아니라 거버넌스 왜곡을 방치하는 데 따른 투자가 불만·우려도 누적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연말 두 명의 대표이사·부회장급 조직인 TF 체제를 유지하며 비상경영 위기감에도 인사가 이 회장 거취 문제를 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바뀐 것은 새 부회장급 조직인 미래사업기획단을 신설한 것 정도다.
이로써 이사회 중심 경영을 내세운 삼성전자엔 총수인 이 회장과 사업지원TF장인 정현호 부회장, 전영현 부회장까지 세 명의 미등기 임원이 존재감을 다투는 구도가 마련됐다. 이들은 주총에서 선임되지 않았으니 상법상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있다. 삼성전자의 이 같은 거버넌스는 투자가 사이에서 누구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구조로 받아들여진다.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위원회 출신 한 인사는 "삼성전자가 TSMC 수준 사외이사를 모시지 못하는 게 아니라 기존 체제에 위협이 될 사외이사는 필요로 하지 않는 게 사실"이라며 "어차피 이 회장은 등기임원이 아니어도 실질적인 의사결정권자로 통하고 있다. 회사 스스로 그렇게 홍보하고 있고, 국민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번 주총도 그렇게 굳이 책임질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안일하게 치른 것으로 보인다"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이번 주총에서 주주와의 대화 창구를 신설하는 등 전보다 소통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이려 했지만 기관투자가 사이에선 전혀 다른 반응이 새 나오고 있다. 지난 연말 이후 삼성전자가 투자자관계(IR) 합리화 정책의 일환으로 주총 표결 영향력에 따라 IR 창구를 대폭 축소했다는 불만들이다.
한 외국계 기관투자가는 "연기금이나 글로벌 의결권자문사 등 큰손 외에 주총 표결에 큰 도움이 안 되는 헤지펀드나 애널리스트 등에 대해 쇄국정책을 펴고 있다는 불만이 나올 정도"라며 "전례가 없던 일이라 삼성전자가 눈과 귀를 닫고 있다는 투자가 불만이 크게 는 것이 최근 상황"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