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성 거품 꺼지며 기업들 실적·주가 부진에 허덕
투자자 조기상환 청구 증가…신규 자금조달처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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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유동성 호황기에 메자닌을 발행했던 기업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후한 몸값과 낮은 수익률로 자금을 조달했었지만 이후 주가 부진이 이어지며 조기 상환 압박이 커지는 상황이다. 많은 기업들이 실적 부진에 허덕이는 터라 상환 자금을 마련하는 것도 녹록지 않다. 증권가는 올해 이런 기업들의 신규 자금 혹은 차환성 일감이 늘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카카오게임즈는 2021년 3월 5000억원 규모 5년 만기 사모 전환사채(CB)를 발행했다. 유동성 호황 분위기를 반영하듯 CB의 표면이율과 만기보장수익률은 0%로 발행사에 유리하게 정해졌다. 기본적으로 주가가 올라야 투자자가 이익을 낼 수 있는 구조다.
카카오게임즈 CB의 주식 전환가액은 5만2100원인데 최근 주가는 반토막에도 못미친다. 작년 영업이익도 전년 대비 절반 이하로 줄어드는 등 실적 부진이 이어지는 터라 당분간 주가 반등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현재 발행잔액은 4633억원인데 오는 31일 조기상환일에 맞춰 조기상환청구권(풋옵션)을 행사한 물량은 3708억이다. 회사 시가총액의 20%에 육박하는 금액이다.
하이브도 카카오게임즈와 거의 비슷한 조건으로 사모 CB를 발행했다. 2021년 5년 만기 CB를 찍어 4000억원을 조달했는데, 오는 9월 첫 풋옵션 행사 시기가 도래한다. 전환가격은 38만5500원인데 역시 주가는 반토막 수준이다. 다만 하이브는 작년 엔터업계 최초로 매출 2조원을 돌파했고, 시가총액도 8조원을 넘어서는 등 카카오게임즈보다는 상황이 낫다.
2차전지 소재 기업으로 주목받은 천보는 배터리 랠리가 시작되던 2022년 2월 2500억원 규모 사모 CB를 발행했다. 발행 당시 주가보다 10%가량 높은 전환가(31만8150원)를 설정했는데, 최근 주가는 9만원 수준에 그친다. 2차전지 시장 성장 둔화, 높은 중국 의존도 등을 감안하면 투자자가 주식 전환권을 행사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오는 12월이 첫 풋옵션 행사 시점이다.
다른 2차전지 관련 업체인 엘앤에프는 2021년 7년 만기 사모 CB 1000억원어치를 발행했다. 작년부터 풋옵션 상환이 시작됐는데 전환가와 주가가 비슷한 상황이라 조기상환을 청구한 투자자는 없었다. 팬데믹에 타격받던 파라다이스도 2021년 2000억원 규모 CB를 발행했는데 오는 6월부터 풋옵션 행사 시점이 도래한다. 작년 일부 투자자가 전환권을 행사하긴 했지만 최근 주가는 행사 가격을 밑돌아 풋옵션을 행사하는 투자자가 나타날 가능성도 있다.
이 외에 자동차 부품 관련 기업 오토앤, 미디어커머스 HLB글로벌, 영화배급사 NEW 등 기업이 메자닌을 조기 상환하거나 상환 부담을 안고 있다. 영상 인식 인공지능 기업 알체라는 오는 8월 CB 풋옵션 행사 시기가 가까워지자 금리 인상 등 CB 조건을 변경해 행사 시점을 내년으로 미뤘다. 산업바이오 전문기업 아미코젠은 주주배정 증자를 통해 작년말 전환사채권자의 풋옵션에 대응했는데, 올해 또 교환사채(EB) 및 CB 조기상환에 수백억원이 필요할 가능성이 있다.
팬데믹 유동성이 풍부할 때는 자산운용사들의 투자 경쟁도 치열했던 터라 적정 선보다 높은 기업가치, 제로쿠폰 등 후한 조건으로 기업들이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메자닌을 발행한 상장사들이 이후 주식 시장 침체와 실적 부진으로 애를 먹는 상황이다. 지금 메자닌을 발행하려는 기업들은 같은 사모라도 훨씬 깐깐한 조건과 치밀해진 실사를 감수해야 한다.
어쨌든 상장사로서 투자자 보호에 신경을 써야 하니 주가를 올리든, 조기 상환 청구에 대응할 자금을 마련하든 해야 한다. 사업이 잘돼 회사에 돈이 쌓여 있거나, 주주들의 손을 빌 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시장에서 새로 자금 조달처를 찾아야 할 수도 있다. 증권사들도 이런 기업들의 손을 잡을 기회가 생길지 관심을 갖는 모습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2021년 이후 사모 메자닌을 찍었다가 상환 시기가 일찍 돌아오는 곳들은 고민이 많을 것”이라며 “기업들의 자금 조달 작업을 도울 기회를 찾고 있는데 올해 사모 CB를 발행하는 일이 많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