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 외 외부평가 필요한데 회계법인들은 부담
돈 안되고 위험성 커…벌써 '포기 방침' 정한 곳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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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정부가 비계열사간 합병가액 산정 규제를 완화하기로 하고 후속절차를 진행 중인 가운데 대형 회계법인들은 난처한 기색을 보이고 있다. 합병 당사자간 의사결정을 최종 확인하는 일을 맡아야 하는데 수익 대비 위험 부담이 크다는 것이다. 합병비율이 논란이 될 경우 회계사는 물론 법인까지 심대한 타격을 입을 수 있기 때문에 벌써부터 ‘참여 불가’ 방침을 정하는 곳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 2월 정부는 ‘투자자 보호를 위한 M&A 제도의 글로벌 정합성 제고방안’을 발표했다. 작년 5월 밝힌 ‘기업 M&A 지원방안’의 후속 조치다. 자본시장법 시행령 및 증권의 발행 및 공시 등에 관한 규정 등을 개정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이르면 3분기 중 개정이 완료될 것으로 예상된다.
개선안의 주요 내용 중 하나는 ‘합병가액 산정 규제 완화’다. 현행법은 합병가액 산정방식(상장사는 시가, 비상장사는 자산가치 및 수익가치)을 구체적으로 규율하는데 이 때문에 기업의 자율 교섭권을 해친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에 정부는 '비계열사간 합병'의 경우 당사자끼리 협의해 합병가액을 정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로 했다. 미국, 일본, 유럽에서도 합병가액은 자율적으로 정한다.
비계열사간 합병 시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제3자 외부평가’를 의무화하기로 했다. 합병 당사 기업이 직접 혹은 외부 평가를 받아 합병가액을 산정할 수 있는데, 이와 무관한 평가사가 이 합병가액이 적정한지 판단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외부 평가사는 회계법인, 신용평가사, 금융투자업자인데 통상 회계법인들이 맡는다.
회계법인 입장에선 새로운 활동 영역이 생긴 셈이지만 썩 반기지 않고 있다. 오히려 개선안이 본격 시행된 후 비계열사간 합병가액 평가 업무를 맡게 될까 고심하는 분위기다.
한국 M&A 시장에서는 인수(Acquisition) 형태의 거래는 많지만 합병(Merger)은 드물다. 합병은 대부분 대기업집단 안에서 일어나고 소액 주주들은 논의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법에 최소한의 기준을 마련해 규제하고 있다. 그런데 앞으로 비계열사간 합병 때는 법 대신 회계법인이 최종 판단을 내려야 한다. 회계법인의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실제 회계법인이 합병 관련 일을 맡았다가 난처해진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합병가액 산정은 주로 평가(Valuation) 부서에서 담당하는데, 합병비율이 조금만 달라져도 논란이 불거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수임을 꺼리는 경우가 많다. 법정에서 결국 전문가로서 양심과 판단을 인정받더라도 그 과정은 고될 수밖에 없다.
계열사간 일이긴 하지만 삼성물산-제일모직, 동원산업-동원엔터프라이즈, 삼광글라스-이테크건설-군장에너지 등 합병에선 합병비율이 문제되거나 회계사와 회계법인이 고초를 겪었다. 교보생명과 재무적투자자(FI) 간 풋옵션 평가를 둔 갈등도 회계법인들이 ‘평가 업무’를 꺼리게 된 계기로 꼽힌다. 일부 대형 회계법인은 이미 ‘합병 평가’ 업무는 맡지 않기로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대형 회계법인 파트너는 “합병가액은 조금만 달라져도 주주들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보니 트집 잡힐 일이 많고 회계사나 회계법인이 큰 타격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며 “한 대형 회계법인은 ‘도장 찍어주는 일’은 하지 않겠다 내부 방침을 정했고, 다른 곳들도 어떻게 해야 하나 고심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정부가 글로벌 시장와 보폭을 맞추겠다는 취지는 긍정적이지만 환경은 크게 다르다. 해외는 주인 없는 회사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단순한 인수보다는 모든 주주가 비슷한 효과를 누리는 합병이 M&A의 기본 형태다. 합병 자문사들은 평가부터 협상, 법률 검토, 소송 대비, 대관 업무 등을 총망라한 업무를 맡는다. 어렵고 위험한 만큼 보수도 수십억원은 너끈히 챙긴다. 단순히 평가만 하고 적게는 수천만원 수준의 보수를 받는 국내 회계법인과는 거리가 있다.
한 투자은행(IB) 관계자는 “해외 합병 자문사들은 단순한 평가에 그치지 않고 합병 절차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많은 작업을 수행하게 된다”며 “국내 자문사들도 이런 역량을 갖추고 있지만 그만큼의 대가를 지급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일을 맡는 것을 꺼린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