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집권 끝내고 홍콩 기반 인사 새 수장으로
정형진 대표 물러난 한국도 일본과 처지 비슷
FICC 인사 지점장 선임에 IB는 임시대표 체제
일본처럼 장고 끝 타지역 인사 선임할지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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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한국 골드만삭스는 지난 수년간 이름값에 비해 잠잠한 행보를 이어 왔다. 정형진 대표의 빈자리를 채우는 작업이 장기화할 가능성도 있다. 이는 시장 내 입지가 줄어드는 와중에 수장이 급작스레 사퇴한 일본 골드만삭스의 상황과도 비슷하다. 골드만삭스는 수개월의 리더십 공백 후에야 홍콩 기반의 인사를 일본 사장으로 낙점했다. 한국도 이와 비슷한 전철을 밟을지 관심이 모인다.
정형진 전 대표는 2008년 매니징디렉터(MD)를 거쳐 2014년부터 골드만삭스 서울지점 IB 부문을 이끈 베테랑이다. 한국 시장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며 괄목한 성과를 냈다. 김종윤 전 대표 이후 두 번째 한국인 글로벌 파트너라는 영예를 바랐는데 몇 차례 기회에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국 골드만삭스의 위상은 전만 못하다. 기업들이 지배구조를 바꾸는 데 신중해지고, 벤처기업들의 거품이 빠지면서 골드만삭스가 장점을 발휘하던 일감이 줄었다. 글로벌 네트워크와 명성에 기대려 해도 대형 거래 자체가 뜸했다. 작년 한국 내 M&A 자문 순위는 10위 밖으로 밀렸다. 기업상장(IPO) 쪽도 상황은 비슷하다.
한국에서 글로벌 파트너 자리를 기대하기 더 어려워지자 정형진 전 대표는 현대캐피탈을 차기 행선지를 정했다. 최재준 FICC(Fixed Income, Currency, Commodity) 전무가 골드만삭스 서울지점장에 올랐고, 변상민 아시아 지역 ECM(주식자본시장) 공동 대표가 투자은행(IB) 부문을 당분간 이끌기로 했다. IB에 힘을 싣던 골드만삭스의 기조와는 사뭇 다른 행보란 평가가 따랐다.
한국 골드만삭스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단면이란 지적도 있다. 2021년 이후 이석용 전무, 윤윤구 부문장 등 MD를 배출하는 성과가 있었지만 2021~2022년 유동성 호황기에 어호선·홍순준·신권호 등 상무급 주축들을 떠나보낸 타격도 컸다. 한국 IB 후계자 라인이 약해지니 FICC에서 지점장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IB 부문 후임 인선 작업도 장기화할 가능성이 있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정형진 전 대표는 글로벌 파트너 승진에서 몇 차례 미끄러지자 골드만삭스를 떠나기로 결정했다"며 "골드만삭스의 중추는 IB지만 후계자 라인이 약해진 상황이다 보니 FICC에 지점장 자리를 내주게 됐다"고 말했다.
한국 골드만삭스의 상황은 일본 골드만삭스(Goldman Sachs Japan)와도 닮아 보인다.
작년 11월 모치다 마사노리 일본 골드만삭스 사장의 사임 소식이 알려졌다. 그는 1985년 골드만삭스에 합류했고 2001년 일본 골드만삭스 사장으로 승진해 20년 이상 조직을 이끌고 있었다. 글로벌 시장에서 일본 골드만삭스의 독자적 입지를 구축한 인물로 평가 받는다. 2017년 일본 도시바메모리(키옥시아) 매각 작업을 이끌기도 했다.
모치다 사장 장기 치세의 아쉬운 점도 있었다. 시니어 임원들은 위로 올라갈 길이 좁아졌고, 잠재적인 후계자 군을 육성하는 데도 실패했다. 일본 골드만삭스의 자율성이 높아진 이면엔 글로벌 시장에서의 고립이라는 반사 효과가 있었다. 일본 내 재무자문 순위까지 하락하면서 모치다 회장은 전격적으로 은퇴 시기를 앞당겼다.
일본 골드만삭스는 이후 5개월간 수장 자리가 공석이었는데 지난달 이마츠 히데히로 대표가 새로 선임됐다. 그는 홍콩 사무소에 업무 기반을 두고 아시아태평양 FICC 프랜차이즈의 공동 대표를 맡고 있었다. 일본 내 IB가 아닌 다른 지역의 전문가를 초빙한 만큼 모치다 사장의 경영 기조와는 달라질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일본 사업의 독자성보다는 글로벌과의 유기성을 강조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한국 골드만삭스 IB의 수장을 선정하기까지 오랜 기간이 걸릴 수 있다는 예상도 나온다. 임시 체제를 되도록 일찍 끝내야 하지만 골드만삭스가 전격적으로 기존 한국 내 인사에 중책을 맡길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일본처럼 장고를 이어가다 다른 지역의 인사를 발탁할지도 관심사다. 일각에선 일본에서 사정이 비슷한 한국 사업까지 아우르지 않겠냐는 시선도 있다.
다만 골드만삭스는 전통적으로 아시아 지역을 일본과 일본 외 지역(Japan/Ex Japan)으로 나누고 있는 만큼 한국과 일본이 한 데 묶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최근 다소 주춤하긴 하지만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쌓은 '브랜드 파워' 가치도 상당한 만큼 이를 포기하는 결정은 하지 않을 것이란 평가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