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약품ㆍ효성ㆍ한국타이어ㆍ아워홈 모두 창업자 혹은 아버지 이후 갈등
결국은 '돈 문제'로 귀결…경영능력 입증ㆍ회사비전 제시와는 무관한 양상
사모펀드들 자칫 부도덕한 오너 일가 '엑시트'창구로 활용될 가능성
경제계 미치는 여파도 그닥…그저 '셀럽'처럼 취급받는 후계자 후보들
-
"회사 창업주인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와 딸이 아들들 몰래 회사 경영권을 팔았다. 아들들은 절치부심해 회사를 되찾고, 회사에서 어머니를 쫓아냈다"
"재벌 부회장이 강남 한복판에서 교통사고를 냈다. 끼어들기를 한 상대방을 쫓아가 보복운전을 가한 후 사고현장에서 도주했다. 사건이 발생하자 막내 여동생이 "오빠는 회사를 떠나야 한다"며 경영권을 장악한다. 그러자 이번엔 오빠와 첫째 여동생이 힘을 합쳐 막내 여동생을 회사에서 쫓아낼 계획을 준비 중이다"
"재벌가 둘째 동생이 첫째 형의 비리를 신고했다. 회삿돈으로 수십억원어치 개인미술품을 사고, 미인대회 출신 여배우를 가짜로 채용해 억대 연봉을 줬다. 첫째가 둘째를 '공갈미수'로 신고했다. 재판은 장기간 진행 중이다. 수년 뒤 아버지가 돌아가신후 유언장 내용이 공개된다. '재산 같이 나눠줄게. 형제끼리 사이좋게 지내라'"
"재벌가 회장이 장남ㆍ장녀를 제치고 막내를 후계자로 선정했다. 본인 지분을 통째로 넘겼다. 수년 뒤 회장이 된 막내동생이 횡령ㆍ배임 혐의로 구속됐다. 그러자 장남과 장녀가 '아버지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생겨 막내를 고른거에요'라며 법원을 찾아 승계 무효를 주장한다. 아버지는 '나는 제 정신이다'라고 설명한다. 장남은 아시아 최대 사모펀드(PEF)를 우군이라고 데려왔다"
아침시간 공중파 방송을 수놓던 막장드라마 시나리오가 아니다. 미국 HBO 케이블서 방영하는 인기 드라마 내용도 아니다. 한국 신문들을 장식하는 재계 뉴스들 요약본이다.
외신에서는 '승계분쟁'(Succession Battle)로 표현된다. 어느 나라에서든 대기업 오너 사후를 전후로 한번씩 나타나는 일들. 그러나 최근 승계분쟁은 본질이 달라지는 분위기다. 경영능력 입증ㆍ당위성ㆍ명분은 모두 빠진 채… 옆에 팝콘 끼고 눈요깃거리로 봐야 할 '남의 집 재산싸움' 수준으로 전락했다.
창업자 '부재'를 감당하지 못하는 오너 일가들
몇가지 공통점이 있다
창업자 혹은 아버지 '부재'가 원인인 경우가 대부분. 생전에 본인 사후를 대비한 승계 프로그램과 재산 배분, 그리고 상속세 대책을 마련 못해서다. 창업자 본인은 능력은 뛰어나 회사를 반석 위에 올려놨다. 하지만 자녀들의 능력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니 사후에 형제ㆍ남매ㆍ자매 혹은 모자 사이에 싸움이 난다.
가족 중 '전과자'가 발생하는 경우도 많다. 횡령ㆍ배임은 그나마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혐의. (배임은 법조계에서도 논란이 많은 이슈다) '음주운전' , '보복운전', '사내폭행' , '갑질논란' 등 일반인들이 보기에도 죄질이 나쁘고 사회적 지탄이 될 범죄를 일가 중 누군가 저지른다.
이사회가 제 기능을 하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창업자에게 충성해 온 인물들로만 이사회가 구성되어 온 터다. 그러니 창업자 사후 오너 일가에서 싸움이 나면 '어머니 편', '첫째 편', '막내 편'으로 이사회에 파벌이 생기기도 한다. 소유ㆍ경영 분리가 안되니 이사회 의장이 전체 주주를 대변해 중심을 잡고 나서지도 못한다.
마지막엔 '돈 문제'로 귀결된다. "상속세를 낼 돈이 없다" "왜 재산이 첫째에게 더 많이 가느냐" 등등. 이 과정에서 누구 경영능력이 더 뛰어난지, 누가 주주와 이사회, 그리고 투자자 모두를 설득할만한 경영성과를 보여줬는지는 거의 조명되지 않는다. 집안 싸움 과정에서 "내가 회사를 더 잘 운영할 수 있다"라며 가끔 자료가 발표되는데…찬찬히 읽어보면 급조한 티가 역력하고, 현실성 떨어지는 미사여구들만 그득그득 들어가 있다. 제시한 이사회 명단엔 친구 혹은 남편이나 아내 이름이 들어가기 일쑤다.
디즈니와 LVMH의 승계분쟁도 이럴까
루이비통ㆍ디올ㆍ티파니, 그리고 모엣샹동ㆍ돔페리뇽ㆍ헤네시를 거느린 프랑스 명품제국 LVMH가 승계이슈로 화제다.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은 일론 머스크를 제치는 세계 최대 부자지만 이미 75세 고령이다. 그간 장녀 (델핀 아르노) 장남 (앙투완 아르노) 등을 비롯한 다섯 명의 자녀들을 그룹 여기저기에 배치해 경영수업을 시켰다. 뉴욕타임스ㆍ파이낸셜 타임스(FT) 등은 누가 제국의 후계자가 될 것이냐를 다룬다.
그러나 회장 본인이 "아르노 가(家)에서 후계자가 나오란 보장은 없다"라고 선언했다. 뉴욕타임스는 아르노 회장의 '전권'과 '제왕적 통치'를 거론하면서도 "누가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만큼 회사를 잘 경영할 수 있겠는가"를 따진다. LVMH에 투자한 기관투자가들은 "아르노 회장이 가족에게 눈이 멀어서는 안된다"라고 경고한다. FT는 이런 투자자들의 목소리를 다룬다.
가족간 분쟁은 아니었지만...디즈니도 수장 교체로 이슈가 많았다. 실적부진과 주가하락이 이어지자 2년 전 디즈니 이사회는 기존 CEO를 해임했다. 그리고 데려온 것이 15년간 디즈니를 이끌던 72세의 밥 아이거. '노병'의 귀환을 시장에서 모두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거대 행동주의 펀드(트라이언 파트너스ㆍ넬슨 펠츠)가 아이거 회장과 그가 제시한 이사회 리스트를 거부하면서 분쟁을 벌였다. 이들의 비판 근거는 "아이거 회장이 항상 후계자를 쳐내고 승계계획을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주총 결과는 무려 94% 주주 지지로 아이거 회장의 승리였다. 아이거 회장이 제시한 성과와 비전이 판단의 근거로 작용했다.
사모펀드는 재벌가 사고뭉치들에게 현금 안겨주는 '봉'?
사모펀드들에게 재벌가 승계이슈는 불가피한 선택지다. 마땅한 후계자가 없거나, 자녀가 승계를 원치 않을 때 고령의 창업자로부터 회사 경영권을 인수할 수 있다. 창업자 역시 매각으로 50%에 달하는 상속세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
그러나 가족 내 '불화'가 발생했을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사모펀드 입장에서는 '어머니 편' , '첫째 편'을 드는 게 중요하지 않다. '50%이상 지분'과 '완전한 경영권'을 가져오는게 목적이다. 하지만 형제ㆍ남매 혹은 부모 자식간에 싸움이 벌어지는 경우는 이렇다할 접근이 어렵다. 이들 가족 모두로부터 지분을 사들여야만 일이 풀린다. 하지만 싸움이 벌어진 상황에서 오너 일가들은 "어느 펀드가 내 뒤에 있다" "어느 펀드와 내가 협상을 진행 중이다"라며 세를 과시하기 원한다.
문제는 이때부터 발생한다. 가족 간 입장정리도 제대로 못해 놓은채 "투자자를 데려오겠다"는 오너 일가들 입에서 펀드 이름이 오르내리는 건 그나마 양호한 편. 행여 이들 오너 가운데 '범법'의 혐의가 있는 경우. "사모펀드가 사고 친 재벌가 자녀들 지분을 사주고 엑시트(Exit) 시켜주는 창구다"라는 비난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
사모펀드가 아무리 '수익'으로 움직이는 집단이라고 해도…고수익의 기반이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면 영속성에 악영향을 미친다. 게다가 한국 사모펀드들 대부분은 국민연금과 각 공제회를 비롯, '공공기관'에서 돈을 받고 있다. "국민의 노후재산을 투자해 어느 집안 사고뭉치 돈 벌어주는데다가 썼느냐"라는 비난은 펀드 운용에 상당한 타격을 줄 수 있다.
작년 말 MBK파트너스가 한국앤컴퍼니 조현식 고문 편에 서서 공개매수를 시도할 당시. 이렇다할 성과를 못낸 원인 중 하나가 '명분'의 부족으로 꼽힌다. 조현범 회장의 횡령ㆍ배임 이슈가 불거졌지만 그렇다고 조현식 고문이 확고한 경영능력을 입증한 것도 아니다. 한국적인 정서(?)로 보면 멀쩡히 생존해 있는 아버지의 온전한 정신을 의심한 장녀에 우호적인 여론이 실리기도 어렵다. 차라리 MBK가 이들 일가 모두를 내보내고 경영권을 획득하겠다고 선언했다면 모를까.
"연예인들 관심 받는 거랑 비슷하네요"
이러다보니 주가 반응도 시원찮다.
사실 경영권 분쟁이 발발했을때 주가가 급반등하는 이유는 '지분 싸움이 벌어질테니 의결권 하나 하나가 소중할 것'이라는 점이다. 공개매수를 하든, 다른 주주 지분을 사오든. 그런 기대감으로 집안싸움이 과격해질 때마다 주가는 급등하는 패턴이었다.
그러나 최근 집안 싸움엔 이런 양상도 잘 나타나지 않는다. "투자자를 데려왔다" "협상 중이다" "자사주를 인수할 계획을 짜고 있다"라는 이런저런 언급은 오가지만 결국은 '말' 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누구 하나 명분이든, 능력면에서든 절대적인 우위를 제대로 증명 못해서다. 그러니 투자자도 따라오지 않는다.
심지어 최근 분쟁 중인 기업들은 재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지 않은 편이다. 그러니 경제계에 미치는 영향도 크지 않다. 2015년 롯데그룹에서 '왕권다툼'이 벌어졌을때 만해도 민감도가 차원이 달랐다. 재계 5위 그룹에 80여개 계열사, 자산총액 100조에 가까운 대기업 집단의 승계문제다보니 사소한 일거수 일투족도 모두 관심거리와 뉴스가가 됐다. 반면 지금 다뤄지는 기업들의 승계 분쟁은? 이 정도는 아니다.
모든 문제는 기업 거버넌스와 이사회 구조가 아직도 전근대적이고, '왕조시대'와 유사하다보니 벌어진다. 상황이 이러니 이제 이들의 집안 싸움은 "또 싸웠다더라" "이번엔 어머니를 쫓아냈다더라" "이번엔 첫째와 셋째가 한편이 됐다더라" 라는 타블로이드 잡지 가십 수준으로 전락하기 시작한다. 마치 연예인 혹은 셀럽들의 일거수일투족과 SNS 코멘트가 보도되듯이.
한국에 '재벌집 막내아들'이 인기 였다면 비슷한 시기 미국 HBO에선 재벌가 승계분쟁을 블랙코미디로 다룬 드라마 '석세션'(Succession)이 인기였다. (오징어게임과 맞붙으며 에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시즌 중 한 장면. 재벌가 후계자로 낙점된 아들이 자신의 승계 정당성을 높이고자 대형 M&A를 추진한다. 힙하다고 떠오른 뉴미디어 한 곳을 1조원이 넘는 돈으로 인수하려는 판이다.
그러나 이 뉴미디어 창업자는 협상 테이블에서 인수제안을 매몰차게 거절하고는 한마디 뇌까린다. "난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뉴미디어 브랜드를 내가 직접 만들어냈다. 그 동안 아드님은 뭘 하셨나? (아버지 옆에서) 총쏘기 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