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 분리 매각 촉각…현대차와 밀월관계도 주목
공급 과잉 국내 화학사, 국내서 사업 조율 움직임
걸림돌 산적해 있지만 총수들 교감 있으면 가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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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경기 회복이 늦어지며 배터리, 화학 등 우리 경제의 주축 사업들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시장이 언제 폭발할지 기약 없는 상황에서 계획한 투자는 이어가야 하고, 호황기 늘려 둔 설비들은 수요 부진에도 가동이 불가피하다. 과거처럼 정부 주도의 산업 조정도 기대하기 어렵다. 이러다보니 시장에서는 대기업끼리 서로 사업을 주고 받으며 위기를 타개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 될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일부 유의미한 움직임도 감지되고 있다.
다음 '빅딜' (Big Deal)대상으로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는 곳은 SK온을 위시한 SK그룹 배터리 사업이다. 국내 대기업과 사업을 함께 영위해가는 형태다.
SK는 ‘정해진 미래’라며 2차전지 사업에 계속 힘을 싣고 있지만 상황이 녹록지 않다. 전기차 시장이 주춤하니 새 투자자들을 설득하는 게 어렵다. 비단 SK의 문제가 아닌 것이, SK온이 흔들리면 삼성SDI와 LG에너지솔루션은 물론 소재 사업에 힘을 들인 기업도 어려워질 수 있다. 이러다보니 SK온은 하반기 우리 경제의 중요 변수 중 하나로도 거론된다. SK의 배터리 사업을 살릴 필요성이 그룹차원이 아닌, 국가산업 차원의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시장에서 거론되는 빅딜 방식은 여러가지다. 동박부문은 구리 트레이딩 경험이 있는 포스코, 분리막은 소재 사업에 주목하는 LG화학이 사업을 인수해줄 잠재적인 원매자로 꼽힌다. SK는 부담을 줄이고, 인수자는 사업을 키우게 된다. 다만 LG화학은 배터리 사업을 확장하기엔 자금이 충분하지 않고, 포스코도 주력 사업 부진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기 어려운 상황이다. 삼성그룹과 빅딜 가능성에 주목하는 시선도 있었다. 삼성과 빅딜 역시 이론적으로는 규모의 경제와 네트워크 다변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 그러나 각국 경쟁당국의 견제를 감안하면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러다보니 SK와 현대차의 협업 가능성이 가장 많이 거론된다. 이미 양사는 밀월관계를 쌓아가는 모양새다. SK온은 핵심 고객인 미국 포드가 전기차 비중을 줄이고, 유럽 합작사(JV) 설립도 무산되며 애를 먹었는데 그 빈자리를 현대차가 메우고 있다. 현대차로부터 조단위 자금을 빌리고 북미 JV도 함께 설립했다. SK온은 최근 2차 상장전투자유치(프리IPO) 작업을 본격화했는데 국내 기관투자가에 현대차가 우군이라 사업성에 문제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향후 현대차가 SK온의 주요 지분 투자자로 나서거나, 북미 현지 JV의 주도권을 가져가는 등 다양한 예상 시나리오가 언급되고 있다. SK그룹과 현대차그룹 고위 관계자들도 몇 차례 물밑 접촉한 것으로 전해진다. SK그룹 입장에선 투자 부담 일부를 덜고, 현대차그룹은 배터리 사업을 내재화해 외부 의존도와 위험성을 줄일 수 있다. 다만 파트너 관계 조정 이상의 빅딜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실제로 양사의 북미 JV에 한정하면 현대차그룹이 SK온 지분을 인수해 내재화에 나서는 것도 가능해 보인다는 의견이 있다"라며 "아직 현대차가 다양한 대안을 초기 검토하는 단계고 SK온의 사업 규모도 워낙 크기 때문에 빅딜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국내 화학산업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화학업종은 팬데믹 유동성 장세가 끝난 후 글로벌 소비가 둔화로 직격탄을 맞았다. 호황기를 전후해 대규모 설비가 완성된 것도 부담인데, 중국발 저가 물량 공세까지 이어지며 판로를 찾기 어려워졌다. 일부 기업들은 자산을 해외에 매각하는 안을 고민하기도 했지만 투자 원가를 챙기기도 쉽지 않았다. 롯데케미칼은 인도네시아(라인프로젝트) 투자를 시작할 때부터 말레이시아(타이탄) 사업 매각을 검토했지만 여전히 빈손이다.
이에 롯데케미칼과 LG화학이 물밑에서 각지의 나프타분해설비(NCC)를 통합 운영하는 방안이 논의되기도 했다. NCC는 특성상 한번 가동을 멈추면 재가동 준비에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든다. 여간해서는 설비를 세우기 어렵다. 여수와 대산 등에 흩어진 설비를 각각 한 그룹이 나눠 맡으면 일부 설비는 가동을 중지해 비효율을 줄이고 생산량도 조절할 수 있다. 당사 회사들은 이런 가능성에 대해 부인했지만 실현할 수 없는 시나리오는 아니란 평가가 나온다.
정부도 지난 4월 '석유화학산업 경쟁력 강화 방안 협의체’를 출범시켰다. 산업통상자원부 주측으로 LG화학, 롯데케미칼, SK지오센트릭 등 기업들과 위기를 넘을 방도를 찾기로 했다. 국내 기업간 M&A를 통해 공급 과잉을 해소하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다른 투자업계 관계자는 “국내 화학제품 생산능력이 소비량을 크게 웃도는 데다 중국 수출까지 어려워지고 있어 업황 회복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며 “갑자기 화학사가 문을 닫아 경제에 혼란이 발생하지 않도록 시장 안에서 정리가 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빅딜이 현실화되는데는 여러 걸림돌이 거론된다. 책임 경영이 강조되면서 총수 생각만으로 대형 거래를 진행하기에 벽이 높아지기도 했다. 실사나 손해배상 조항 없이 대형 M&A를 진행했다는 미담은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따져보면 한국 경제사에서 빅딜이라 불릴 만한 대기업간 거래도 많지 않았다. 2014년 삼성-한화, 2015년의 삼성-롯데 빅딜이 대표적이다. 한화는 엔진과 레이더 등 군수 기술들을 강화해 승계 구도의 초석을 다졌고, 롯데는 기초소재 사업 변동성을 완화할 장치를 마련했다. 삼성은 1등이 되기 어려운 사업들을 정리했다. 그러나 삼성그룹과 한화, 롯데간 빅딜은 이미 10년 전의 일이다.
정부의 역할도 한계가 있다. 작년 HMM 매각만 해도 정부는 현대차그룹과 포스코의 참여를 원했지만 이들은 결국 움직이지 않았다. 빅딜에 책임을 지는 것은 총수나 경영진인데, 정부가 빅딜을 권유한들 선뜻 받기엔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 과거에 비해 각 그룹의 젊은 총수 들이 격의없이 사업을 논의하는 분위기가 마련되면서 '통큰 거래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은 높아지는 분위기다. 총수가 있는 기업일수록 협상의 용이성과 의사 결정의 신속성이 가능하고, 총수들끼리 교감만 확실하다면 ‘선계약-후실사’ 방식으로 진행되는 사례도 있다. 비밀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그만큼 서로를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