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령·배임 소송도 불사…투자자들 "회수할 방법이 없다"
국내 투자 손사래치는 VC들…해외 상황 별반 다르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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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지난해부터 불어닥친 국내 벤처시장 한파가 하반기 들어 본격화하고 있다. 단순 실적 우려를 넘어 스타트업들이 줄폐업하고, 대규모 구조조정에 나서는 등 유동성 위기가 현실화된 것이다. 투자사들이 위험해지면서 비상장 스타트업에 투자한 벤처캐피탈(VC) 등은 투자금 회수가 불투명해지며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어려운 환경에 기업들의 횡령 및 배임 이슈까지 불거지며 VC와 기업 간 법적 소송도 줄을 잇는 분위기다. 예비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 스타트업)으로 꼽혔던 ‘기대주’들도 예외는 아닌 가운데 벤처 업계에선 “더 이상 국내에서 스타트업 투자는 못하겠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9일 금융권에 따르면 협업 플랫폼 '스윗'으로 알려진 스윗테크놀로지스는 최근 인력을 70% 줄였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2017년에 시작한 스윗테크놀로지스는 한때 SK브로드밴드가 찜한 스타트업으로 알려지며 기업가치가 고공행진했다. 서비스는 글로벌 대상이지만 창업자와 직원 상당수가 한국인이고, 한국에 사무실도 두고 있다. 시리즈 A에서 이미 1700억원대 기업가치를 인정받았고, 시리즈 B로 유니콘에 등극한 뒤 나스닥 상장을 하겠다는 목표를 내걸 정도로 고속 성장을 보인 곳 중 하나였다.
다만 이후 세일즈 역량 한계로 성장이 둔화됐고 자금난에 직원 임금을 마련 못해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한 것이다. 최근 몇달간 4대보험도 납부하지 못해 직원들이 사측을 상대로 내용증명 발송을 준비하는 등 갈등도 점차 커지고 있는 양상이다.
최근 추가 투자유치를 모색하고 있지만 쉽지 않은 분위기다. 스윗테크놀로지스의 주요 주주는 미래에셋벤처투자, SV인베스트먼트, IMM인베스트먼트, 스마일게이트인베스트먼트, 두나무파트너스 등 국내 대형 VC다.
핀테크 스타트업으로 차기 유니콘 대표주자로 꼽혀온 뱅크샐러드도 올초 경영권 매각 위기에 휩싸였다. 2대 주주인 SKS PE가 드래그앤콜 행사권을 고민하면서다. 드래그앤콜은 투자자에 드래그얼롱(동반매도청구권) 옵션을 부여하는 대신 피투자회사가 FI 보유 지분을 되사올 수 있는 권한을 갖는 형태다.
SKS PE가 최대주주인 김태훈 뱅크샐러드 대표의 지분을 포함한 경영권 매각이 가능해졌으나, 실적이 일부 호전되자 일단 1년 유예한 것으로 전해진다. 뱅크샐러드의 실적 지표가 개선되는 시점을 기다리겠단 입장이다. SKS PE는 SKS마이데이터를 통해 지난 2022년 뱅크샐러드에 1000억원을 투자했다. 당시 뱅크샐러드의 기업가치는 6000억원에 달했다.
2017년 공식 론칭한 뱅크샐러드는 2022년에는 KT, 기아, SKS마이데이터 등으로부터 기업가치 6000억원을 인정받고 투자를 받는 등 급속도로 기업가치가 뛰었다. 그러나 이후 수익모델 한계와 경쟁 심화로 성장세가 주춤하면서 좀처럼 ‘예비’ 유니콘 딱지를 떼지 못했다.
마지막 보루 소송전도 불사…"그래도 '먹튀'하면 방법 없어요"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스타트업 경영진들의 횡령 및 배임 문제도 불거지고 있다. 투자자들이 투자금 회수에 난항을 겪으면서 벤처업계에서는 크고 작은 소송들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투자 당시 계약서에 아무리 많은 조건들이 있어도, 회사가 ‘내줄 돈’이 없는 상황에서는 투자금을 회수할 방안이 많지 않다. 이렇다 보니 투자금을 되찾기 위해 ‘마지막’ 보루로 찾는 곳이 결국 법원인 셈이다.
기관투자자 등 ‘남의 돈’으로 투자한 VC 입장에서도 할 수 없이 법적 대응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VC의 운용역들이 담당 스타트업의 경영진들을 배임으로 소송을 걸어 진행 중인 경우가 한둘이 아닌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법원에 가도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투자계약 건에서 풋옵션 행사 등의 계약조건도 상황이 악화하면 실효성이 사실상 애매하다. 통상 대주주 등 이해관계인들이 범법을 저지르는 경우, 진술 보장을 잘못하는 경우 등의 상황에서 풋옵션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계약에 넣지만 투자자 입장에서는 결국 회수가 되냐의 문제인 점을 고려하면 해결책은 아니다.
결국 회사가 ‘돈이 없는’ 상황에서는 여러 안전장치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통상 VC가 스타트업에 투자할 때 상환전환우선주(RCPS)를 인수하는 형태로 투자가 이뤄진다. 우선주를 보통주로 전환할 수 있는 '전환권'과 만기가 되면 투자금 상환을 요구할 수 있는 '상환권'이 있는 주식이다.
이때 상환할 수 있는 조건은 ‘배당가능이익’이 있어야 하는데, 배당가능이익이 결국 이익잉여금이 쌓여야만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이익잉여금이 없는 회사는 배당도 불가한 것이다. 투자자들이 아무리 상환권을 행사해도 상법상 상환이 되기 어려운 구조라는 설명이다.
한 대형 VC 관계자는 “횡령했을 때 위약벌을 강하게 부여하긴 하지만 아무리 안전장치를 마련해 놔도 ‘먹튀’를 하면 투자자가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며 “최근 국내 스타트업 중에서 대표가 횡령하면서 조직이 다 와해한 사례가 있는데, 이런 경우 청산 절차를 밟아서 잔여 재산을 처리해 봤자 투자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먹튀’하면 사실상 회수는 물 건너갔다고 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대형 VC들은 업계 평판을 고려해 통상 투자 대상회사와 소송 전에 들어가는 경우는 많지 않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향후 투자금 규모가 큰 기업이 위기에 처하면 손실이 누적된 대형 VC들도 선택지가 많지 않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국내 투자는 이제 안할래요"…해외라고 다를까
상황이 이렇다 보니 벤처투자자들은 “국내 투자는 보지 않고 있다”는 입장도 다수다. 특히 한때 각광받던 플랫폼 기업은 아예 눈길도 주지 않는다는 평이다. 아무리 이용자수가 많아도, 재무구조가 어느 정도 탄탄하다고 보여도. 이번 티몬·위메프 사태도 이커머스 포함 플랫폼 기업들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됐다는 평이다.
물론 플랫폼 기업 중에서도 안정적인 반열에 오른 대형 기업들은 예외긴 하지만, 그런 기업들은 아예 ‘리그’가 달라진 상황이라 더 이상 벤처 업계의 투자 대상이 아니다.
다른 대형 VC 관계자는 “지금 국내 플랫폼 기업들은 기업가치 회복이 불확실하고, 떠오르는 AI기업들은 기술력이 의심스럽다”며 “한동안 플랫폼 기업 투자는 거의 보지 못했고, AI도 연초까지는 반짝 인기가 있더니 이제는 한풀 인기가 꺾인 분위기”라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위험 분산을 위해 포트폴리오를 넓혀 해외 투자로 눈을 더 돌려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다만 해외도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은 문제다.
국내 기관투자자들도 투자한 미국 AI(인공지능) 스타트업 '온플랫폼'(ON Platform)은 최근 횡령 및 배임 의심 사건이 터지며 시끄럽다. 업계에서는 해당 기업의 기업가치가 사실상 ‘제로(0)’가 됐다고 보고 있다. 이 기업은 지난해 2500만달러 규모의 시리즈B 브릿지 투자유치 당시 인정받은 기업가치가 4억달러(약 5540억원)에 달한다.
투자금 손실 위기에 처한 국내 기관투자자들은 미국 현지에 직원을 보내 사태 파악에 나서고 있다. 국내에서는 미래에셋벤처투자가 벤처펀드를 통해 2019년 시리즈A 단계부터 투자했고 하나증권 PB센터인 클럽원도 운용사를 통해 투자했다고 알려진다. 투자금이 적지 않은 상황이라 국내 투자자들의 손실도 적지 않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국내 투자자들도 소송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 제기되지만 미국에서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절차가 복잡하다 보니 난관이 예상된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보통 투자계약을 하면서 안전장치를 걸어두지만, 회사 자체가 어려워진 상황에서는 소송 등 법적 절차를 통한 회수도 쉽지는 않다"며 "국내에서도 쉽지 않은데 해외 투자건 같은 경우에는 현지 법이나 절차 등 고려해야 할 부분들이 더욱 많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