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두산그룹서 '합병비율 악용' 잡음
금감원 압박에 국회도 법 개정 움직임
법 개정 시 '주가' 살핀 합병 어려워져
현 제도 아래서 합병 서두르자 시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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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기업들의 지배구조 조정 움직임이 잦은 가운데 시장에서 잡음도 커지고 있다. 소액주주들이 불만을 표하고 있고 예전이면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았을 정부 당국이나 국회에서도 문제점을 지적하고 견제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향후 지배구조 개편에 새로운 걸림돌이 생길 가능성이 커지면서 미리 합병 등 거래를 추진하려는 분위기도 엿보인다.
한국 대기업의 지상 과제는 항상 총수 일가의 경영권을 어떻게 유지하느냐다. 세계 최고 수준의 상속세를 감수하고 승계 작업을 완성하기 위해 일감 몰아주기 등 다양한 수단이 활용됐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자주 활용된 것은 그룹 내 합병이다. 오너 일가가 세운 회사가 어느 정도 기반을 닦은 후 그룹 내 알짜 계열사와 유리한 조건으로 합쳐 자산 가치를 확대하는 식이다.
글로벌 M&A 시장에서는 인수(Acquisition)보다는 합병(Merger) 거래가 많다. 최대주주만 프리미엄을 누리기 보다 두 기업이 서로 조건을 맞춰 모든 주주가 같은 과실을 누리는 방식이다. 국내에선 인수 거래가 대부분이지만 유독 그룹 안에서만 합병 거래가 많다. 이해관계를 조율하기 편할 뿐만 아니라 그룹과 오너 일가에 유리한 시점과 방식을 정하기에 유리하다.
그룹 내 합병 거래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처럼 구설에 오르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큰 무리 없이 진행됐다. 사기업의 경영상 판단에 따른 것이고, 법에 정한 조건을 따르기 때문에 외부에서 문제를 삼기 쉽지 않았다. 최근 SK이노베이션-SK E&S 합병도 경영상 긴박한 이유가 있었던 터라 시장의 반발은 예상보다 크지 않았다.
지난달 두산그룹이 지배구조 개편 방안을 내놓으며 화제를 모았다. 두산로보틱스가 두산에너빌리티를 두산밥캣의 지분을 보유한 투자부문으로 분할하고, 이를 두산로보틱스가 흡수합병하는 방식이다. 연간 1조원 이상의 이익을 내는 두산밥캣의 주주 입장에선 적자기업인 두산로보틱스와 대등한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 달라울 리 없다.
두산그룹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 사업 구조를 바꿔가며 위기를 넘었다. 그 과정에서 각계의 지원을 받은 경우도 있었는데 이번엔 분위기가 다르다. 정부 당국은 물론 국회도 불편한 시각을 보이고 있다.
금융감독원이 합병을 계속 문제삼는 상황이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두산그룹이 합병비율을 조정할 때까지 신고서 정정을 무제한으로 요구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두산그룹은 지난 16일 합병 정정신고서를 제출하며 한 발 물러선 모습을 보였지만 이후에도 금감원의 문턱이 낮아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 기업의 '밸류업'을 강조하는 정부 입장에선 두산그룹의 움직임이 곱게 보일 리 없다.
국회에서도 '두산밥캡 방지법'이 논의되고 있다. 두산그룹 지배구조 변경과 관련한 논란이 시작된 후 자본시장법 내 합병비율 산정 관련 규정을 바꾸자는 개정안이 발빠르게 발의됐다. 상장사 합병 시 주가가 아닌 기업 본질가치를 기준으로 합병비율을 정해야 한다는 것이 골자다. 여야간 정쟁 갈등이 여전한 상황이지만 민심에 영향이 큰 사안인지라 개정 작업이 계속 힘을 받을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이달 말부터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소위에서 본격적인 논의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한 국회 관계자는 "기업의 지배구조와 관련된 사안은 내용이 어렵기 때문에 소수 의원실에서만 관심을 가졌다"면서도 "이번에 두산밥캣이 워낙 화제가 되면서 이를 살펴보는 의원실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정부와 국회가 논란이 될 만한 기업의 지배구조 개편에 제동을 걸면서 기업들도 이후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셀트리온은 주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끝에 셀트리온제약과 합병을 추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설문조사 결과가 긍정적이지 않기도 했지만 민감한 시기에 무리하기도 어려웠을 것으로 풀이된다. 평판에 민감한 다른 대기업들도 조심스러운 분위기로 전해진다.
반대로 법이 개정돼 운신의 폭이 완전히 좁아지기 전에 미리 합병 등 지배구조 조정 작업을 마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정부 차원에서 상속세율 완화 등 기업에 우호적인 정책도 나오고 있지만 블록딜 예고제 등 껄끄러운 제도도 많아졌다. 자본시장법까지 발의 취지대로 개정되면 주가 상황을 살펴 지배구조를 조정하기는 쉽지 않아진다.
한 대형 법무법인 변호사는 "대기업 중에선 굳이 시끄러울 때 움직여 눈총을 받지 말자는 곳들도 있지만 법으로 확실히 길이 막히기 전에 움직이자는 곳도 많다"며 "법 개정 전에 합병을 추진할 수 있겠느냐 자문을 요청하는 곳들이 많아진 분위기"라고 말했다.
이런 기류는 내년까지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시장의 이목이 집중된 사안이긴 해도 정무위, 법사위, 본회의 등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연내 법이 통과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법이 바뀌기 전까지 합병 계약이나 자문 계약을 하면 법 적용을 받지 않을 것이란 예상도 있다.
한 대형 회계법인 회계사는 "자본시장법이 개정되기 전에 합병 관련 계약을 맺은 곳은 법 적용이 유예될 것이란 이야기가 있는 상황이라 그 전에 합병을 추진하는 기업들도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