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너회사 동원해 '책임경영' 강조한 늘린 한화
'거대 에너지 기업 탄생'으로 포장된 SK온 살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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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 모멘텀 확보, 책임경영 추진, 경쟁력 강화 등 대기업발 지배구조 개편 과정에서 내세우는 명분들은 언제나 그럴싸하다. 겉으론 오너와 회사, 주주와 투자자 모두에게 득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꺼풀 벗겨보면 소수의 이익으로 귀결되거나 또 일부 투자자들이 '공정'의 잣대를 들이댈 수 있는 거래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최근 대기업이 추진하는 구조 개편 과정에선 잡음이 끊이질 않는다. 두산과 SK의 지배구조 개편, 한화그룹 오너일가의 공개매수 추진 등이 대표적이다. 모두 현행법의 테두리 안에서 '합법'과 '주주가치 제고'란 명분으로 포장된 거래들이다.
'주주권 강화 움직임'이란 단어는 이미 식상하다. 투자자들은 계산에 밝아졌고 또 집단화하는 모습이 자리잡았다. 기업들이 제시하는 자본시장 거래에 명확한 실익을 따지고 이익이 침해될 소지가 있다면 언제든지 연대해 맞서려는 움직임이 뚜렷하다.
과거에 오너 또는 이사회가 결정을 내리고 주주총회란 절차를 거쳐 속전속결로 진행할 수 있었던 거래들은 이젠 합법과 공정이란 기준을 충족해야 하고, 투자자들의 실익이 명확해야만 수면위로 등장할 수 있게 됐다.
늘 한발 늦었던 금융당국, 심지어 정치권이 투자자들보다 먼저 나서 화두를 던지고 있는 상황. 과연 우리나라 기업들이 스마트한 투자자들과 깐깐해진 당국의 눈높이를 맞출 준비가 돼 있다고 선뜻 말하긴 어려워 보인다.
두산그룹은 지배구조 개편을 강행한다. 금융당국 수장이 작심하고 비판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배구조 개편의 요지는 그룹 영업이익의 97%를 차지하는 두산밥캣을 만년 적자회사 두산로보틱스와 합병하겠단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룹은 두산에너빌리티 주주들에게 두산밥캣의 지분을 넘기는 데 동의할 것을, 두산밥캣 주주들에겐 두산로보틱스 주식 일부로 교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두산은 자본시장법에 따라 명확한 계산식을 제시했다. 엄밀히 따지면 주식의 시가를 기준으로 기업을 분할하고, 주식을 교환하는 정상적인 거래로 분류된다. 또 주주총회, 주식매수청구란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절차상 문제는 없다. 금융감독원, 한국거래소, 정치권이 나서 제동을 걸기 시작한 것은 법의 테두리를 벗어났기 때문은 아니다.
금감원은 "투자자의 합리적인 투자판단을 저해하거나 투자자에게 중대한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로 증권신고서를 다시 제출할 것을 요구했고, 거래소는 주주보호 방안과 관련해 두산에너빌리티 측의 기업 지배구조 보고서를 정정할 것을 요구했다. 정치권에선 '두산밥캣 방지법'이 발의된 상태다. 모두 지배구조 개편을 철회하라는 무언의 압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두산이 강조하는 '합법'이란 명분이 아니라 주주와 투자자들의 '실익'에 초점을 맞추라는 의미와도 같다. 두산이 시너지를 강조하고, 증권신고서에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위험성을 고지한들 거래의 본래 목적과 본질이 달라지지 않았음을 지적한 것이다.
실체가 모호한 사업적 시너지를 내세울 것이 아니라 분할과 합병, 주식교환의 거래가 왜 하필 소수의 이익으로 귀결되고, 우량 기업의 투자자들이 손익계산을 따져야하는 현 시점에서 등장했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한화그룹은 최근 김동관·김동원·김동선 등 김승연 회장의 세 아들이 지분 전량을 보유하고 있는 한화에너지를 통해 ㈜한화의 지분을 공개매수했다. 이는 오너일가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 뚜렷한 거래다.
한화에너지는 공개매수를 추진하면서 "책임 경영을 강화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지배구조, 재무구조, 사업내용 등에 변경을 가져오는 구체적인 장래계획은 수립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앞뒤가 맞지 않는 어설픈 명분으로 포장된 거래란 비판도 나왔는데 한화에너지는 결국 목표했던 공개매수 수량을 채우지 못했다.
오랜기간 ㈜한화 주식을 보유한 투자자들은 복잡한 계산기를 돌려야했다. 매수청구권을 행사하자니 손실을 확정해야하고, 막대한 양도소득세에 실익도 크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투자자들과는 달리 한화에너지, 즉 오너일가는 그 어떤 시점보다 낮은 가격에 지분율을 늘리는데 성공했다.
한화그룹은 "한화에너지와 ㈜한화의 합병 계획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사실 현 시점에도 유의미한 지분율을 확보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화에너지와 ㈜한화의 단순합병 작업의 실익은 크지 않다. 굳이 현 시점에 합병을 시인할 유인이 없단 의미다. 시간이 흘러 지금의 거래들이 잊혀질 즈음 현행법 하에서 어떤 형태의 거래가 등장할지는 누구도 예단하긴 어렵다.
시나리오만 무성했던 SK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은 결국 SK이노베이션과 SK E&S의 합병 추진으로 일단락됐다. 역시 그룹의 캐시카우인 SK E&S를 활용해 SK이노베이션과 SK이노베이션의 자회사 SK온을 살리겠단 명확한 의지가 반영된 거래다.
밑빠진 독에 물붓기가 될 것이란 우려 속에서 SK그룹은 합병을 강행했다. 논란을 예상하듯 합병 비율은 최초 거론된 수치보다 완화했지만 앞으로 주식매수청구권 행사 추이를 지켜봐야한다. SK이노베이션 주주들 역시 복잡한 계산식에서 해답을 찾아야하는 상황인 셈이다. 그룹이 밝힌 사업적 포트폴리오 경쟁력 강화, 재무손익구조 강화, 성장 모멘텀 확보 등에 전적으로 믿고 지지하는 투자자들이 얼마나 있을진 미지수다.
SK그룹은 합병이란 급한 불을 끄더라도 앞으로의 과제가 더 많은 상황이다. IMM크레딧솔루션, 한국투자PE 컨소시엄, MBK파트너스 컨소시엄, KKR 등 굴지의 사모펀드(PEF) 운용사들과의 이해관계를 합치해야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투자자들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 거래들이 시장에 속속 등장하면서 최근엔 아예 주주들에게 의사결정을 맡겨 버리는 기업도 등장했다. 셀트리온그룹은 셀트리온과 셀트리온제약의 합병을 추진하기에 앞서 주주투표를 실시했다. 과거 서정진 회장의 '3사 합병' 발언이 단초가 됐다.
대주주는 다수 주주 의견 비율에 지분을 산입하겠다며 중립을 선언했지만 사실상 기권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수 십만명의 주주들에게 기업의 미래를 맡기겠다는 진정한 주주친화 전략인지, 경영자와 이사회가 그 기능과 권한을 내려놓은 것인지는 투자자들이 판단할 일이다.
대기업발 일련의 자본시장 거래들은 금융당국의 칼날을 더욱 매섭게 만들었다.
금감원은 앞으로 운용사들의 의결권 행사 방향을 면밀히 들여다보겠단 의지를 나타냈다. 당국의 일관성 있는 메시지가 전달되는 가운에 운용사들의 자율적인 의결권 행사가 가능할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단 이런 기조가 기업들을 향한 압박용 카드로 활용될 여지는 충분하다.
아직 과거의 의사결정 구조에 갇혀 투자자들을 동조자 쯤으로 여기던 기업들이 스마트한 주주들, 현미경을 들이대기 시작한 금융당국, 허점을 파고들어 기회를 잡기 위한 국회를 상대할 준비가 돼 있을까? 오너들과 그들을 모시는 경영진들이 고심해 볼 시점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