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증권사들, 관계 유지 위해 리스크 감수하며 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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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주요 대기업들이 잇따라 사모 영구채를 발행하는 가운데, 증권사들이 자기자본으로 이를 인수하는 사례가 급증했다. 재무 사정이 악화된 대기업이 수요예측 없이 손쉽게 증권사에 물량을 떠넘기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다만, 초대형 증권사들이 기업과 우호적 관계를 위해 제살깎아먹기식 영업을 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3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현대오일뱅크는 2000억원 규모의 사모 영구채(신종자본증권) 발행을 추진 중이다. 1500억원 규모의 공모채를 준비하는 것과는 별도로 진행된다. 연말과 내년에 만기가 도래하는 회사채 물량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회사 측은 증권사들에게 "사모 영구채를 자기자본으로 인수해달라", 요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올해 들어 대기업이 사모 영구채를 발행하면, 주선기관인 증권사가 이를 직접 사들이는 경우가 늘었다. 지난 2월 롯데지주를 비롯해 SK인천석화, 신세계건설, SK온, 한화솔루션 등 사모 영구채 발행을 공시한 기업 대부분이 증권사에 자체운용한도(북;book) 사용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진다. 일부 증권사는 북이 부족하자, 특수목적회사(SPC)를 세워서 인수에 나서기도 한다. 증권사가 신용보강을 하기 때문에 사실상 직접 인수와 다르지 않다는 관측이다.
해당 사안에 대해 현대오일뱅크측 관계자는 "구체적으로 정해진건 없으나 기관들에 세일즈하는 방향을 검토 중이다"라고 말했다.
대기업들이 증권사에 적극적으로 북 사용을 요청하는 현상은 이례적이라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증권사가 회사채에 투자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본질적인 업무는 '중개 및 주선'에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대기업은 증권사의 직접 투자 없이도 다른 기관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으나, 금리 인상과 경기침체로 인해 자금조달 환경이 악화된 것이 이러한 변화의 배경으로 해석된다.
한 IB업계 관계자는 "대기업들이 사모 영구채를 발행하면 국내 주요 증권사가 직접 인수하는 것이 올해의 추세"라며 "재무상황이 어려운 기업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발행사가 '사모 영구채를 외부에 팔지 말라'고 요구한다. 외부기관으로부터 자금을 모으는 것보다 증권사 자금을 활용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발행사 입장에선 자금조달을 비교적 수월하게 할 수 있고 평판 하락 등의 잡음도 피할 수 있다. 예컨대 재무구조가 훼손된 기업이 공모채 시장을 찾았다고 가정해보자. 기관투자자들의 호응을 이끌지 못해 수요예측이 흥행에 실패한다면 향후 자금조달을 확보하는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아울러 미매각에 따른 투자심리 위축, 평판 하락 등의 이슈가 불거질 수 있다.
반면 증권사들은 사모 영구채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투자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대기업이라고 해서 모든 계열사가 우량한 것은 아니다. 업계 관계자들은 신용등급이 상대적으로 낮은 비상장사의 경우 상환리스크를 무시할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수천억 원씩 투자했다가 소위 '물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실제로 국내 주요 증권사들은 과거 CJ CGV의 전환사채(CB)를 떠안았다가 장기간 손실을 본 경험이 있다.
이러한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일부 대형 증권사들은 자체 북을 활용해 적극적으로 사모 영구채 인수에 나서며 중형사와 격차를 벌리고 있다. 예컨대 한국투자증권은 자금조달 필요성이 큰 대기업들에 수천억원의 지원 가능성을 피력하고 있다. 14조원에 달하는 발행어음북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자기자본이 큰 대형사일수록 이런 방식의 마케팅 전략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에 회사채 시장이 일부 플레이어들에게 유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자체 북 한도가 크거나, 은행·캐피탈 등 금융 계열사가 많아 캡티브(발행을 주관하며 인수투자를 약속;captive) 영업에 유리한 일부 대형 증권사만이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당초 회사채 시장 수위권을 목표로 영업에 박차를 가했으나 캡티브 영업과 북 영업 등으로 인해 영향력 확장에 한계를 느끼고 있다"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