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장 안 보이는 삼성전자, 복원력은 남아있나
입력 2024.09.26 07:00
    반도체 진출 50주년…메워지기 시작한 초격차 해자
    여전한 TF 그늘…거버넌스 왜곡發 부작용은 악순환
    HBM 실기는 첫 사례…시선은 파운드리 부실 우려로
    길어지는 리더십 부재 그림자…청사진은 누가 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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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삼성전자를 1등 기업으로 보는 시각을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이재용 회장을 포함한 경영진들은 초격차 바통을 이어받은지 수년 만에 선두를 내준 이름들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위기설은 시장 단골 소재로 자리매김했는데, 상황을 바로잡을 사람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대선단의 방향성을 걱정하던 목소리들은 이제 배의 복원력이 얼마나 남아있느냐를 따져보고 있다.

      초격차 해자 속에서 태어난 '신(新) 반도체인'

      올해는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지 50년 되는 해다. 1993년 D램 시장 1위에 올라선 지도 30년을 넘겼으니, 현재 구성원들은 모두가 1등 아닌 삼성전자를 경험해 보지 못했다. 시장점유율 뿐 아니라 생산능력·원가, 공정 경쟁력·자본력·인재풀 모두 경쟁사를 압도하는 강력한 경제적 해자를 구축한 채로 유리한 싸움에 임한 셈이다. 달리 보자면 이재용 회장을 위시한 경영진부터 임직원 모두는 초격차 수성의 바통을 물려받은 입장들이다. 

      지금 그 해자가 메워지고 있다. 지난 한 달 새 증권가는 삼성전자의 3분기 순이익 눈높이를 기존보다 2조원 이상 낮춰잡았다. 엔비디아향 고대역폭메모리(HBM) 납품 성적은 여전히 불명확하고, 회복하는 듯하던 업황은 재차 휘청이고 있다. 반대로 올 하반기를 기점으로 SK하이닉스 D램 매출액이 삼성전자를 넘어설 것이란 관측은 늘어난다. 수익성에서 SK하이닉스에 추월당한지 1년여 만에 D램 왕좌를 통으로 내주는 상황을 코앞에 두게 됐다.

      이런 상황에 삼성전자는 40년 전 제정했던 '반도체인의 신조'를 새로 마련 중이다. 지난 5월 DS부문장으로 복귀한 전 부회장의 조직 재정비 작업과 함께 삼성전자의 위기감을 한눈에 드러내는 장면으로 꼽힌다. 반도체인 신조는 1983년 이병철 창업주와 이건희 선대 회장이 메모리 사업에 진출하며 제정한 10가지 다짐이다. 

      그러나 총론 차원에서 해자를 메운 원인을 바로잡지는 못하고 파생되는 각론들에 미봉책을 쏟아내는 게 아니냐는 반응이 나온다. 바뀌지 않는 상층부에 무력감을 느끼고, 사기 꺾인 인재들이 떠나가는 마당에 기강을 조이고 푸는 것이 얼마나 효과를 거둘지 기대하기 어렵다. 작년 이후 내부 폭로성 뜬소문이 늘어나고 노조와의 잡음이 커진 이유도 다르지 않다는 지적이다. 

      투자업계 내 삼성전자 출신 한 인사는 "과거의 주역인 전 부회장 입장에선 오랜 1등 DNA가 독이 됐다고 볼 수도 있다. 임원들의 주말 반납이나 전반적인 근무기강을 정비하는 등 작업들도 부분적으론 맞는 조치"라며 "그러나 여전히 사업지원 태스크포스(TF)와 정현호 부회장의 실권이 더 강력한 상황으로 파악된다. 문제를 만든 상층부는 건드리지 못하고 자꾸 밑에서만 책임을 찾는 형국으로 비치게 되는 셈"이라고 전했다. 

      인재경영 철학까지 꼬아버린 거버넌스 왜곡

      사업지원 TF로 인한 거버넌스 왜곡의 부작용이 초격차 상실은 물론 전사 차원에서 악순환을 일으키는 과정으로도 풀이된다. 왜곡된 의사결정 구조가 성과보상 체계와 오랜 인재경영 철학까지 꼬아놓고 있다는 것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사업지원 TF 같은 곳간지기, 재무통이 실권을 쥐면 성패가 불확실한 미래 투자 결정이나 외부와의 경쟁 없이도 존재감을 증명할 수단이 많아진다"라며 "TF에는 내부 보고를 반려하고 물리치는 방식만으로도 손쉽게 권위를 세울 수 있는 인센티브 구조가 작동하게 된다. 미래 시장에서 승부를 봐야 하는 삼성전자 사업 구조와는 딴판이다"라고 설명했다.

      삼성전자 인수합병(M&A)에 관여했던 다른 한 인사는 "특정 M&A 안건이 올라가면 '마진(수익률)을 두 자릿수로 만들어오라'든가 식으로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부터 나온다"라며 "숫자도 중요하지만 사업적으로 승부를 걸어볼 사안인지, 삼성에 어떤 경쟁력이 필요한지 따져보는 모습과 거리가 멀었다. 어차피 돈은 D램이 벌어다 주고 내부에서 감 놓고 배 놓는 일만으로도 오랜 시간 위계질서를 누려왔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미 HBM 대응 실기는 이 같은 구조적 문제가 처음 노골적으로 드러난 사례로 회자하고 있다. 사업지원 TF로 인한 수뇌부의 의사결정 진공 상태가 실적 악화, 인력 이탈, 경쟁력 상실의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 입증된 것이다. 

      의사결정 '진공' 여전한데 파운드리로 옮겨가는 우려

      이제 시장의 시선은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사업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작년부터 HBM 이후 문제가 터질 곳은 파운드리가 될 거란 얘기가 많았는데, 최근 구조조정에 들어간 인텔이 파운드리 분사를 앞당기며 삼성전자 사정도 재차 조명 받고 있다. 양사는 설계부터 제조, 판매까지 모두 영위하는 세계 최대 종합반도체기업(IDM)이다. 외부 고객을 모셔야 하는 파운드리에서 비슷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삼성전자가 지금까진 적자를 버텨낼 캐시카우(메모리)나 캡티브(시스템LSI)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업계에선 인텔이 파운드리를 분사하는 목적을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다. 외부 투자자를 유치해 부족한 자본을 채우되 벼랑 끝으로 내몰아 자생할 수 있는 영업 경쟁력을 갖추겠다는 것이다. 

      IDM의 파운드리 전략에서 뭐가 정답인지는 외부에서 판단할 수 없는 문제다. 인텔의 전략이 오판이라는 목소리도 적지 않고, 삼성전자가 같은 전략을 취할 이유도 없다. 결국 시장에선 경영진이 어떤 청사진을 가지고 결정을 내리느냐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삼성전자에선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리더를 특정하지 못한다. 삼성전자에 대한 안팎의 걱정과 실망감도 여기에 있다. 반도체 총괄을 맡고 있는 전 부회장은 물론 대표이사 한종희 부회장도 이만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위치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국내 파운드리 가동률도 다 채우지 못하고 있는데, 미국 정부 보조금을 받고 짓고 있는 현지 신설 파운드리는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다"라며 "현지 인력 충원도 어렵고 비용이나 규제 문제로 국내 팹처럼 라인을 전환하는 방식도 사용하기 어렵다. 어떻게 고객을 모셔올 것인지 뾰족한 수가 안 보이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위기 신호가 계속되는데, 사태를 바로잡고 해결할 주체가 안 보인다는 목소리는 해를 거듭할수록 커지고 있다. 내년 반도체 업황이나 경기를 두고 혼란이 늘자 삼성전자가 과거 수익성을 회복할 수 있을지 걱정하는 목소리마저 나온다. 핵심 사안에 대한 이재용 회장의 의중이나 청사진이 공유되지 않는 가운데 연말 인사를 주목하는 시선은 늘어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