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의 한참 늦은, 그리고 잘못된 사과문
입력 2024.10.14 07:00
    취재노트
    고객·인재·투자자 떠나는 마당에 등장한 사과문
    진정성 떠나 주가는 '5만전자'로…2년여 내 최저
    3년 전 한종희 부회장 때와 달라진 것 없는 내용
    왜 전 부회장이?…다른 경영진은 어떤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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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전영현 삼성전자 반도체(DS)부문장이 고객과 투자자, 임직원을 지목해 사과문을 썼다. '이례적'이라는 파격을 제외하면 여러 지점에서 잘못된 사과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사과문 등장 하루 만에 주가는 5만원대로 추락, 2년 내 최저가를 기록했다. 

      사과문으로 마음을 돌리기엔 너무 늦은 시점이다. 고객과의 잡음이 불거지고 임직원이 삼성전자를 이탈하기 시작한 지 수년이 흘렀다. 투자자 입장에서 종합해 보자면 배가 기울 대로 기운 셈이다. 사과문에서 진정성이 읽힌다 할지라도 주식을 보유할 이유는 못 된다. 

      실제로 시장에서는 이번 사과문을 '당분간 실적 부진이 이어질 것'이라는 사전 예고쯤으로 받아들이는 목소리가 많다. 고대역폭메모리(HBM) 만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범용 메모리 회복도 생각보다 더딘데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손실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이전 실적에서 회계적 눈속임을 의심하는 시선도 여전하다. 

      증권사 한 관계자는 "올해 들어 IR 창구가 전보다 좁아지면서 충분한 소통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불만이 늘었는데, 갑자기 사과문과 함께 어닝쇼크가 나왔다"라며 "그간 시장이 의심하던 여러 불안 요인들을 인정하는 모양새가 됐다"라고 말했다. 

      전 부회장 사과문은 3년여 전 한종희 대표이사 부회장의 사과 내용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시 한 부회장은 갤럭시 시리즈의 게임최적화서비스(GOS) 성능 조작 논란 때문에 주주총회장에서 고개를 숙여야 했다. ▲주주와 고객에 심려를 끼쳐 송구하고 ▲고객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신기술 분야에서 신성장 동력을 찾겠다는 내용이었다. 조직문화에 대한 언급을 빼면 이번과 대동소이하다.  

      당시 삼성전자에 대한 시장의 진단 역시 정도의 차이가 있다 뿐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리더십·전략 부재가 경쟁력 상실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었다. 그때 약속했던 유의미한 인수합병(M&A) 계획이나 메타버스·로보틱스 등 신산업 성과나 갤럭시 전용 칩 개발 등 전략들은 어느새 종적을 감춘 듯하다. 

      사과문을 낸 주체가 전 부회장이라는 점에서 혼란은 더 커진다. 

      전 부회장은 반도체 전선에서 물러나고 수년이 흐른 지난 5월 교체 발탁됐다. 전선에 복귀한지 5개월 된 장수가 3년여 전에도 있었던 사과를 거듭 반복하는 장면은 삼성전자를 둘러싼 불안한 시선에 기름을 붓는다. 연말 인사를 코앞에 두고 있다 보니 이미 여러 가지 위태로운 가정들이 오르내리는 중이다.

      만약 전 부회장이 바뀌지 않는 삼성전자에 대해 총대를 메고 작심 발언한 것이라면 다른 경영자들은 그간 뭘 하고 있었느냐고 되물을 수밖에 없다. 세간 이목이 집중된 HBM 문제는 시장에 드러난 지 1년 남짓 지났을 뿐 임직원 동요나 투자자 우려는 훨씬 오래전 시작됐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전 부회장이라서 이 같은 문제를 바로 볼 수 있었다고 한다면 다른 경영자들은 심각한 위기를 마주할 의지나 능력이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다른 경영자들도 다들 알고 있는 문제를 이제 와서 전 부회장이 새삼 끄집어낸 경우라면 더 심각하다. 지금 안팎에서 꼽는 삼성전자의 위기는 반도체에 국한되지 않는다. 모바일, 가전 등 개별 사업부는 물론 책임 소재가 불명확한 거버넌스까지 진단 내역은 갈수록 다채로워지고 있다. 갑자기 반도체 부문만 발라내 사과문을 내놓는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삼성전자엔 대표이사인 한 부회장을 비롯해 사업지원 태스크포스(TF)를 이끄는 정현호 부회장까지 같은 부회장 직급만 세 명이다. 대외적으로는 결국 삼성전자를 대표하는 얼굴일 수밖에 없는 이재용 회장도 있다. 전 부회장의 이례적 사과문을 곱씹다 보면 결국 나머지 경영진들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를 떠올리게 된다. 

      기업 경영이 부침을 겪을 수 있고, 그때마다 번번이 사과와 반성을 촉구할 수도 없다. 그러나 무게감 있는 인사들이 입을 닫고 있다면 진정성 있는 메시지도 빛을 보기 어렵다. 앞서 언급했듯 이미 위기는 수년 전부터 복합적, 점층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삼성전자의 부진한 실적과 주가에 대해 반도체 수장만이 대표로 사과하고 반성해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