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력 앞세운 MBK가 앞단에 섰지만
장씨 VS 최씨, ‘황금알 낳는 거위’ 누가 손에 쥐냐 싸움
고려아연 빼면 내세울 것 없는 영풍 자체사업
후대(後代) 먹거리 생각하면 막막
오너家 우선매수권 포기 사례는 사실상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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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가와 기업인의 싸움으로 비쳐지는 고려아연의 경영권 분쟁은 동업관계였던 장씨 일가와 최씨 가문의 갈등이 그 본질이다. 어느 한 쪽의 승패를 떠나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두 집안은 앞으로도 가업(家業)을 사수하기 위한 경쟁을 계속 펼칠 가능성이 높다. 장씨와 최씨일가 모두 캐시카우 '고려아연'을 놓치고선 후대(後代)를 장담하긴 어려운 상황임은 마찬가지이다.
영풍은 고려아연의 지분 25%를 보유한 단일 최대주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가문의 전통으로 인해 고려아연의 경영은 최씨일가가 도맡아 왔고, 현재도 최윤범 회장을 중심으로 한 최씨 일가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엄밀히 따져보면 최대주주인 영풍이 고려아연의 '적대적 M&A를 시도한다'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다만 '위기에 놓인 대주주가 우군을 끌어와 장악을 시도한다'는 측면으로 본다면 틀린 말도 아니다.
돈 되는 일을 마다할 리 없는 사모펀드(PEF) MBK파트너스 참전이란 이벤트를 걷어내면 영풍그룹의 깊은 고민이 보인다. 비철금속(아연)이 주력인 고려아연을 제외하고 자체 사업은 사업은 쪼그라든지 오래다. 이미 경영에 관여하기 어려워진 고려아연에 최대주주의 지위마저 잃는다면 후대에 '재벌가(家)'란 수식어가 붙을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기도 하다.
2014년~2015년 주당 150만원을 넘나들던 영풍의 주가는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이 발발한 올해 초 20만원선에 겨우 걸쳐 있었다. 최근 경영권 분쟁으로 인해 주가가 큰폭으로 오르며 시가총액 7000억원에 도달했지만 이마저도 코스피 기업가운데 300위권에 불과하다. 영풍이 보유한 고려아연의 지분(25%) 가치에도 한 참 못미치는 수준이다.
영풍은 지난해 개별 기준 1400억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3년 연속 적자를 기록중이다. 적자 폭역시 커지는 추세다. 지난해 영풍의 연결기준 순손실은 840억원(연결기준)이다.
최씨 일가와는 달리 장형진 고문의 두 아들 장세준 부회장(코리아써키트 부회장), 장세환 씨(서린상사 전 대표)의 경영 성과는 눈에 띄지 않는다. 장세준 부회장은 영풍의 지분 16.9%를 보유한 최대주주, 장세환 씨는 11.5%를 보유한 대주주이다. 영풍은 전문경영인 손에 맡겨진지 오래다. 장세준 부회장은 영풍의 최대주주이지만 이번 싸움은 산수(傘壽)를 앞둔 장형진 고문이 사실상 그룹을 대표해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다.
장 부회장이 대표이사직을 맡고 있는 코리아써키트(PCB전문생산업체)는 조 단위 매출을 올리고 있지만 지난해 영업이익과 순이익 모두 적자를 기록했다. 반도체 패키지 매출 부진, 전방시장 침체의 여파를 고스란히 맞았다.
고려아연을 제외하면 영풍그룹 내에서 돈을 벌고 있는 계열회사는 영풍전자, 서린상사, 코리아니켈 정도이다. 영풍이 지분 100%를 보유한 영풍전자는 지난해 116억원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영풍의 재무상황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긴 어렵다. 지난해 180억원의 순이익을 거둔 코리아니켈 역시 영풍 지분율은 27%로 고려아연의 지분율(34%)이 더 높다.
서린상사(2023년 순이익 130억원)는 비철금속의 해외 유통을 담당하는 계열사이다. 최대주주는 고려아연(지분 50%)이지만 이제껏 경영은 장형진 고문의 차남 장세환 전 대표가 맡아왔다. 동업의 상징과도 같았던 서린상사의 이사회는 올해 초 고려아연 측 인사들로 채워졌고 사명 역시 KZ트레이딩으로 바뀌며 경영권 갈등의 트리거가 됐다.
소비자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영풍문고도 장씨 일가가 온전히 소유하고 있다고 보긴 어렵다. 현재 영풍문고는 영풍문고홀딩스를 통해 지배하고 있는데, 영풍문고홀딩스는 장세준 부회장 일가의 회사인 씨케이의 34%를 포함해 지분 절반가량을 장씨일가가, 나머지는 고(故) 최기호 창업주의 며느리 5인이 각각 6.6%씩 보유하고 있다.
한마디로 장씨 일가가 오롯이 손에 쥐고 있는 알짜 계열사가 없다는 의미이다.
영풍이 사업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동안 고려아연은 승승장구했다. 2019년 5조2000억원 수준이던 매출액은 지난해 7조3000억원까지 증가했고 매년 안정적으로 5000억원 이상의 순현금을 만들어 내고 있다.
직접적인 지분율만 봤을때 최씨 일가 역시 고려아연에 대한 확실한 지배력을 갖고 있다고 보긴 어렵다. 단 현대차·LG·한화 등 사업적 관계가 밀접한 주요 대기업의 우호지분을 확보했고, 대기업과 손을 잡는 과정에서 경영적 판단 역시 최 회장의 손을 거쳤다는 점에서 최씨 일가의 확실한 지배력이 있다고 평가하는데 무리가 없다. 물론 최윤범 회장의 경영권 방어를 위해 자사주를 취득하는 과정은 추후 별개로 평가받아야 한다.
더 이상 자체 사업만으로 활로를 찾기 어려울 것이란 위기감, 지분을 보유하고 있을 뿐 언제 어떻게 줄어들지 모를 고려아연 지배력에 대한 불안감은 영풍이 경영권 분쟁에 불을 지핀 근본적인 원인이다. 이 과정에서 아시아 최대 사모펀드 MBK파트너스가 참여했고 영풍을 대리해 전선을 펼치고 있다.
영풍과 MBK의 주주간계약에는 MBK가 경영을 주도하고 영풍이 협조하는 방식이 명시돼 있다. MBK·영풍 연합이 공개매수에 성공해 이사회를 장악한다면 당장 경영은 전문경영인의 손에 맡겨질 가능성이 높다.
MBK와 영풍의 새로운 동업 관계가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진 미지수이다. 단 MBK와 영풍 모두 나름의 이해관계로 미래를 내다보고 있다. 양 측은 풋옵션과 콜옵션 그리고 공동매각요구권(Drag-Along Right)과 동반매도청구권(Tag-Along Right)를 각각 보유하고 있다.
10년 후엔 MBK가 우선매수권(Right of first refusal)을 갖게 되는데 이에 앞서 MBK가 주식 처분을 원하면 영풍이 우선매수권을 행사할 수 있다. 언제가 될 지는 미지수지만 MBK가 투자금회수에 나설 때 영풍이 고려아연의 경영권을 갖고 올 기회가 생긴단 의미다.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고, 주주를 위해서 고려아연의 지분을 MBK에 넘기겠다는 장 고문의 말을 100% 신뢰할 수 있을까? 사실 망한 오너일가가 아니고서야 '우선매수권'을 포기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현재로선 장씨일가가 캐시카우 고려아연을 오롯이 가져올 방안은 없지만 MBK를 디딤돌 삼는다면 후사를 도모할 수 있다. 영풍그룹, 장씨 일가는 시간을 벌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