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의 자리를 꿰차려는 사모펀드(PEF)
입력 2024.10.24 07:00
    MBK의 고려아연 경영권 도전은 ‘이정표’
    재벌 vs PEF 간 전쟁은 이제 시작
    PEF들의 자본력과 수준은 높아지는데
    재벌들은 여전히 ‘甲’ 위치라고 오판
    PEF는 국내 LP로부터 자유로워야한다는 숙제
    그럼에도 시장에서의 영향력은 더 커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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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국내 최대 사모펀드 MBK파트너스(이하 MBK)는 고려아연에 대한 공개매수를 두고 “국내 시장에서 의미 있는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자평했다. 여전히 진행형인 고려아연에 대한 적대적 M&A를 두고 성공과 실패에 대한 제각각의 예상들이 나오고는 있지만, MBK가 말한 바대로 한국 자본시장의 ‘이정표’인 것만큼 확실해 보인다. 지난 60년간 한국의 경제 성장을 주도해온 주체 중 하나인 ‘재벌(Chaebol)’과 20년이라는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영향력이 급속도로 커진 사모펀드(PEF) 간의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됐다는 걸 알린다는 점에서 말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장면들은 예상치 못했다. 재벌과 PEF는 공생 관계라 여겼기 때문이다. 재벌들이 구조조정 과정에서 비전략자산을 처리해주든가, 잠깐의 유동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파킹딜’을 도와주는 게 PEF였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PEF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외환위기 이후 관(官)이 주도했고 이런 역할을 기대해서였다. 과거엔 공생 관계라는 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사정이 달라졌다. 두 관계의 '수준 차'가 생기기 시작하면서다. 재벌들은 창업주 시대를 지나 3, 4세대의 시대로 접어들었고 커다랗던 그룹은 쪼개지기 시작했다. 재벌 안에서도 상위 그룹과 그렇지 않은 그룹들의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기업집단 순위에서 밀리는 재벌들의 수준은 점점 더 떨어지고 있다.

      PEF들, 특히나 상위권 PEF들은 창업자 아래로 전문성을 갖춘 파트너들이 보좌하고 있다. 국내 주요 연기금뿐만 아니라 해외 투자자들의 자금도 받아들이면서 ‘글로벌’ 면모를 갖췄거나 갖출 채비를 하고 있다. 같은 기간 동안 PEF들의 수준은 상대적으로 올라간 셈이다.

      그럼에도 재벌들은 여전히 PEF를 대하는 방식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국내 PEF 관계자는 “재벌은 갑, PEF는 을이라는 공식은 유효하며 그 과정에서 이제는 자존심이 상할 일들도 많아지고 있다”며 “말도 안되는 수준으로 상황이 나빠진 계열사를 PEF에 그냥 떠넘기려는 상황들이 아직까지 있다”고 전했다.

      상위권 PEF들의 대표들이 오너 경영인들보다 연배로도 앞서는 시점이 됐다. 일례로 마이클 병주 킴 회장이 1963년생이고,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이 1975년생이다. 80년대생 오너경영인도 등장했다. 그런데도 재벌들은 PEF를 자본시장의 대등한 입장의 파트너가 아닌, 갑을 관계가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어 PEF업계에선 이런 인식 자체가 진절머리 난다는 얘기도 나온다. 

      행동주의의 활성화는 이렇게 불만이 많은 PEF들에 날개를 달아줬다. 소수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며 대(代)를 이어 부(富)를 축적하는, 구태의연한 재벌들의 모습을 반길 투자자도 여론도 없다. PEF들이 재벌들에 도전할 개연성은 재벌 스스로 제공했다. 최근 몇 년간 이들의 다툼은 예견 됐었고, 고려아연은 정점이자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 드러내 놓고 있진 않지만 PEF업계도 속으로는 MBK를 응원하고 있다.

      다만 PEF가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몇몇 전제 조건이 있다.

      가장 중요한 건 자금 조달 루트의 다변화, 그 중에서도 해외 자금 확보다. 국내에서 국민연금을 위시한 기관투자가(LP) 의존도가 높은 PEF들은 MBK의 ‘과감한’ 도전을 꿈도 꿀 수 없다. MBK가 이 싸움을 끌고 갈 수 있는 것도 결국 그 뒤를 받쳐주고 있는 해외자금 덕분이다. 비록 ‘중국계 자본이 국내 기간산업을 건드리게 해선 안된다’라는 반대편의 빌미를 줬지만 말이다.

      PEF 관계자는 “금융당국과 국민연금, 정치권과 재벌들은 느슨하지만 오랫동안 구축된 그물 같은 관계도를 맺고 있어 아직까지는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볼 수 있다”며 “PEF 입장에선 이것들과 무관한 해외자본을 얼마나 당겨올 수 있느냐가 ‘자유도’를 결정짓는다”고 설명했다.

      여론의 인식을 개선하는 것도 숙제다. PEF가 M&A에 나서면 상대방이나 정치권, 여론은 PEF를 ‘기업사냥꾼’으로 몰아간다. ‘수익성을 끌어올리기 위해 우선 인력 구조조정을 통해 사람들을 잘라낸다→예상했던 수익을 거두면 재매각을 통해 투자회수(EXIT)를 한다→그러고 나면 그 기업은 껍데기만 남는다’라는 게 그들의 레토릭이다. PEF들의 선진경영 선례보다는 앞서 언급한 사례들이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건 PEF들이 넘어야 할 높은 허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EF들이 재벌들과의 싸움에서 승기를 잡고 그 자리를 꿰찰 가능성은 시간 문제다. 국내 산업 구조조정에서 PEF들 없이, 재벌들로만 할 수 있는 건 더 이상 없다. 한 산업을 영위하고 버티는 것도 어려운데 여러 산업을 동시에 컨트롤할 수 있는 오너 경영인은 당장 떠올려 봐도 이제 몇 없다. 정부도 도와줄 수 없다. 외환위기 이후 산업 구조조정의 밑그림을 그렸던 엘리트 공무원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재벌 경영이 PEF 경영보다 선(善)이라고 볼 명분도 잃어가고 있다. 대를 이어 그룹을 건사하려는 수요도 예전 같지 않다. 상속세, 증여세도 발목을 잡는다. 개인적인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경영에 관심을 갖는 오너가 앞으로 얼마나 더 나올까. 주주 친화를 내세우면 재벌과 PEF 중 누구 손을 들어줄까. 재벌 창업주들처럼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을 주체는 이제 재벌일까, PEF일까. 결국 지금 재벌들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상위권 PEF들이 차지할 개연성은 더 높아지고 있다. 이는 PEF 예찬론이 아니다. 시장이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젠 이들을 어떻게 적절하게 견제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