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에 오너·경영진 실명 도배…관리 능력마저 상실한 삼성전자
입력 2024.10.25 07:00
    취재노트
    외면하기 힘든 수준까지 커져버린 삼성전자 위기론
    경영진 책임 당연한데…회사는 이름 가리느라 분주
    이미 직원들은 익명 공간에서 버젓이 실명 거론 중
    난맥상 바로잡지 않으면 수습 안 되는 형국만 지속
    • (그래픽=윤수민 기자) 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삼성전자 블라인드가 시끄럽다. 직급과 소속을 특정하기 어려운 익명의 직원들이 삼성전자 소속을 내걸고 수시로 폭로를 쏟아내고 있다. HH(정현호 부회장), KKN(김기남 종합기술원 회장), JB(이정배 메모리사업부 사장) 등등 오너 경영인과 부회장, 사장단을 가리지 않고 수뇌부의 실명을 버젓이 내걸며 자기 회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HBM 대응 실패를 성토하는 글에는 2년여 전 미래 가능성을 일축했던 경영진들의 발언을 재조명하는 댓글이 어김없이 달린다.

      이런 마당에 회사는 특정 경영진 이름을 지우느라 진땀 빼는 장면을 보이고 있다. 시대와 동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 이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삼성전자 모습이 아니다. ‘관리의 삼성’이란 별칭은 이미 무색해졌고 여론 대응 능력도 예전 같지 않다. 점점 수습이 불가한 상황으로 치닫는 모양새다. 

      외국인투자자들은 30거래일 내리 12조원 가까이 삼성전자 주식을 팔았다. 위기라는 진단이 나오는 게 당연하고 경영진 실명이 거론될 수밖에 없다. 거론되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쪽이 제발 저린 상황이라는 심증만 늘어난다. 

      한때 블라인드는 출처불명의 설익은 풍문이 도는 조심스러운 공간으로 통했다. 그러나 지금 삼성전자에 한해선 블라인드가 차라리 공신력 있는 창구로 거론된다. 블라인드 내 폭로가 시차를 두고 기사화하거나 기사화된 내용이 블라인드를 통해 재확산하는 식으로 주거니 받거니가 이뤄진다. 최근 사업지원TF에 대한 폭로도 일맥상통한다.

      투자자 사이에서도 블라인드가 IR 창구를 대체할 만한 언로로 받아들여지는 모습이다. 회사가 IR에서 밝히지 않고, 언론이 다루지 않는 사안이 블라인드를 통해 가장 먼저 새나오는 사례가 늘고 있다.

      증권사 한 관계자는 "엔비디아향 HBM 공급 퀄테스트(최종 신뢰성 평가) 문제만 해도 기관이나 애널리스트들이 IR 담당자를 통해 확인하는 것보다 블라인드가 빨랐다. SK하이닉스와의 실적 역전 여부 역시 마찬가지였다"라고 전했다.

      "HH가 실질적 오너인데 나갈리가?"

      사업지원 TF 수장인 정 부회장이 삼성전자의 실질적 주인이라는 말도 심심찮게 나온다. 하반기 들어 경영진들의 자사주 매입이 본격화하는 가운데 '최고 실세에 직책이 부회장이지만 주식이 1주도 없다'라는 비난도 함께다. 이는 투자업계에서 삼성전자를 바라보는 시각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외국계 투자은행(IB) 한 관계자는 "수년간 각 기업들의 M&A 자문 수수료 지출을 집계해 보니 삼성전자가 중견기업보다 아래에 있었다"라며 "정현호 부회장이 있는 동안은 삼성전자가 M&A를 비롯해 큰 결정을 내리지 못할 거라는 시각이 많다. 지난해 일부 IB들이 M&A 검토 과정에 투입되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감감무소식이다"라고 설명했다. 

      글로벌 기업 삼성전자를 커뮤니티 익명 게시물로 파악한다는 게 앞뒤가 맞지 않는 듯하지만 삼성전자 사정에 밝은 투자업계 관계자를 통하면 금세 조각을 맞춰볼 수 있다.

      이전에 삼성그룹 빅딜에 참여했던 M&A 업계 한 인사는 "블라인드에 올라온 내용이 과거 삼성전자 모습과 너무 달라 업계 사람들끼리 여기저기 확인해 보고 깜짝 놀란다"라며 "과거 해외 기업 M&A 과정에서 정보가 새나갔다는 이유로 다 된 거래를 무산시키고 현지 자문사를 특정해 책임을 묻던 칼 같은 모습과는 거리가 너무 멀어졌다"라고 전했다. 

      성토 범위는 수뇌부 지근거리에 위치한 경영진 전반으로 확산하고 있다. 정 부회장과 함께 재무통으로 분류되는 박학규 재무총괄(CFO) 사장은 물론 엔지니어 출신 임원진도 초격차 상실의 책임이 있다는 식이다. 블라인드에는 HBM 시장이 전체의 10% 정도에 그칠 것이라 일축했다는 이정배 메모리사업부장 과거 발언이 캡쳐 사진 형태로 돌아다닌다. 시장에선 소위 '서초동'향 보고를 담당한 인사들로 분류된다. 

      난맥상을 바로잡지 않으면 지금 같은 상황이 계속 반복될 것으로 보인다. 회사는 내부 직원들은 물론 외부 투자자들의 궁금증에 아무런 답도 못한 채 특정인의 이름만 빼는 데 골몰해 있는 느낌이다. 회사가 위기를 공언한 터에 누군가의 책임만 가리려 들어봤자 한번 불붙은 위기설을 잠재우기 어렵고, 직원들은 계속해서 익명의 창구로 달려갈 공산이 크다. 경영진 입장에선 초유의 위기 속 직원들의 행태가 야속할 수 있지만 이들을 익명의 공간에 내몰고 공신력을 실어준 게 누구인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이 와중에도 이재용 회장은 침묵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