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SK도 디커플링 고민…반도체 산업 M&A 극과극 온도차
입력 2024.11.21 07:00
    반도체 필승 공식 깨지며 삼성-SK도 '제 갈 길'
    삼성 고전하는 사이 AI 편승한 SK는 승승장구
    기술력 혹은 SK와 접점 있어야 높은 가치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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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한국 경제를 이끌던 반도체 산업 내 지각변동이 일어난 지 오래다. 시장의 패권이 인공지능(AI) 중심으로 완전히 재편되면서 한국 반도체 산업의 두 축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지난 3분기 양사 실적 발표에서도 이 같은 고민이 드러났다. 연말 이후 반도체 업황에 대한 투자가들의 질문에 SK하이닉스나 삼성전자 모두 '응용처와 제품별로 시장 수급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같은 메모리 반도체 안에서도 잘 팔리는 것은 계속해서 품귀를 빚고, 아닌 것은 재고 정상화 시점을 따지기 어렵다며 산업의 디커플링(탈동조화)을 언급했다.

      통상 반도체 시장은 분류에 따라 업황 주기와 진폭은 달라도 장기적으로 성장하는 곡선을 그렸다. 그러나 현재는 AI 시장에 필요한 반도체가 아니면 장기 성장을 점치기 어려운 분위기다. 하나의 굵고 튼튼한 동아줄로 여겨지던 반도체 산업이 여러 갈래로 나뉘고 있다. 전후방에 위치한 유관 산업에서도 급격한 부실화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엿보인다.

      반도체 생태계 내 기업들의 표정은 제각각이다. 어느 회사가 주요 고객이고, 얼마나 독점적인 기술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M&A 시장 내 기업가치도 큰 차이가 나고 있다.

      최근 매각이 본격화한 HPSP는 반도체 전공정에 필요한 고압수소어닐링(HPA) 장비를 삼성전자, SK하이닉스, TSMC 등 반도체 기업에 공급하고 있다. HPA는 선단공정에 반드시 필요한 장비로 HPSP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산한다. 공정의 한 길목을 쥐고 있다는 특성 때문에 '한국의 ASML'로도 불린다.

      HPSP는 아직 설립 10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고 있다. 반도체 선단공정이 확대되며 2019년 이후 매출이 크게 늘었다. 회사는 2022년 코스닥에 상장했고 현재 2조원 중반대 시가총액을 보이고 있다. 매각 지분 약 40%에 경영권 프리미엄을 감안하면 조단위 몸값이 기대된다.

      국제 정세의 변화는 반도체 산업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바이든 행정부의 반도체 지원법(칩스법)을 비판해 왔다. 칩스법이 폐지되지 않더라도 미국의 중국 반도체 견제는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 반도체 산업은 중국과 거리를 두거나 기술 장벽을 치는 것이 중요해졌다.

      최근 매각이 진행 중인 한 소형 반도체 장비 기업도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반도체 웨이퍼 표면을 평평하게 하는 공정(CMP, 화학적기계연마)에 쓰이는 소모품을 생산·공급하는 업체다. 아직 매출 규모가 크지 않지만 잠재 투자자들은 값싼 중국 제품에 대체되지 않을 기술력을 갖고 있어 투자 가치가 높다 판단하고 있다.

      국내 반도체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의 연관성이다. AI 반도체 생태계에 포함된 SK하이닉스는 HBM(고대역폭 메모리)를 앞세워 승승장구하는 반면 삼성전자는 가동률을 유지하는 데도 애를 먹는다. 이 중 어느 쪽에 기대느냐에 따라 관계 기업들의 입지도 갈릴 수밖에 없다.

      두산그룹은 올해 반도체 사업 확장을 꾀했다. 세미파이브(반도체 설계 솔루션), SFA반도체(패키징 솔루션), ITEK(테스트) 등 인수를 검토하거나 협상에 임했으나 모두 중단했다. 시스템 반도체 테스트 사업을 하는 두산테스나는 삼성전자를 주요 고객으로 두고 있는데, 삼성전자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부진이 이어지며 함께 고전하고 있다.

      작년 이후 광진화학(화학제품), 우진기전(전력설비) 등 여러 반도체 관련 기업들이 사모펀드(PEF)로 인수됐다. 탄탄한 회사들이지만 삼성전자의 부진과 설비투자 축소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당분간 반도체 관련 투자 시 SK하이닉스향 매출이 어느 정도인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기업 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실적을 발라내서 살펴야 하는 상황이 됐다"며 "두 기업이 모두 잘 할 때도 있지만 지금처럼 그렇지 않을 때도 있으니 양쪽 모두에 발을 걸쳐둘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영역은 산업용 가스다. 이제까지 수혜를 본 거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일부는 투자 회수 전망이 불투명해졌다.

      SK스페셜티는 반도체 공정에서 이물질을 세척하는 데 쓰는 삼불화질소(NF3)를 생산한다. 삼성전자에도 일부 물량을 공급하지만 SK하이닉스가 핵심 고객이다. SK하이닉스 실적 호조에 힘입어 후한 몸값을 받아들었다. 반면 똑같이 NF3를 생산하지만 상대적으로 품질이 떨어지고 삼성전자 의존도가 높은 효성화학 특수가스 사업은 협상을 거듭할수록 몸값이 낮아졌고 결국 우선협상대상자 선정이 철회됐다.

      산업용 가스 기업 에어프로덕츠는 한국 법인을 매각을 추진하다가 중단했다. 삼성전자의 평택 5공장(P5) 가스 공급 사업을 수주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P5 추진 여부가 불투명해지며 기업가치가 1조원 이상 낮아졌기 때문이다. 6공장(P6)은 더더욱 기대하기 어렵다.

      에어퍼스트도 처지는 비슷하다. 작년 소수지분 매각 때는 4공장(P4) 수주 성과와 P5 수주 기대감으로 후한 기업가치를 인정받았는데 불과 1년 새 분위기가 급변했다. 경쟁사보다 약한 안전장치를 보장받고 에어퍼스트에 투자한 블랙록자산운용도 난처한 상황이 됐다.

      다른 투자업계 관계자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호황인 미국이 자국 안에 반도체 라인을 구축하게 되면 한국 내 설비의 가치는 더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삼성전자만 믿고 투자했던 곳들은 회수에 애를 먹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