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무 위기론 확산하자 그룹이 나서 대응
10년전 부진 때 넣은 이례적 조건에 발목
사안 해결돼도 본원 경쟁력 회복은 과제
-
롯데그룹이 롯데케미칼에서 불거진 유동성 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진땀을 빼고 있다. 롯데케미칼의 부진은 이미 오래 됐지만 정작 이번 위기론의 발단은 10년 전 업황 부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투자자들의 요구에 따라 넣은 이례적인 재무약정(커버넌트)이 독소조항이 돼 이번 위기론을 키웠다는 평가가 나온다.
21일 롯데지주는 롯데케미칼이 일부 공모 회사채의 실적 관련 재무 특약을 준수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사채권자들과 순차적으로 협의를 진행하고 있으며 차주 사채권자집회 소집공고를 낼 예정이라고 했다.
롯데케미칼은 지난 2014년 이후 회사채를 발행하면서 ▲연결재무제표 기준 부채비율 200% 이하 ▲3개년 평균 상각전영업이익(EBITDA)/이자비용 5배 이하 조건을 유지하기로 약정한 바 있다.
부채비율은 올해도 75%대로 여유가 있지만 이자보상배율이 문제가 됐다. 이자보상배율은 2013년 9월부터 올해 3월까지는 10~36배 수준이었지만 올 9월말 4.3배로 위반 상황이 발생했다.
롯데케미칼은 현재 2조원 이상의 공모 회사채 발행 잔액을 갖고 있다. 회사채 커버넌트 위반이 발생하면 전체 채권의 교차부도(크로스 디폴트)가 발생한다. 지난주 3분기 실적과 커버넌트 위반 상황이 확인되자 시장이 동요했고 주말 사이 그룹 전체의 유동성 위기 루머가 확산했다.
-
롯데그룹은 빠르게 진화에 나섰다. 롯데케미칼은 18일 '롯데그룹 유동성 위기 관련 루머는 사실무근'이라고 공시했다. 커버넌트 일시적 적용유예(Waiver)를 받기 위해 채권자와도 협의를 진행해 왔다.
21일엔 입장 자료를 통해 충분한 유동성을 확보하고 있어 회사채 원리금 상환에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롯데그룹은 56조원 가치의 부동산 자산을 갖고 있으며 예금도 15조원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롯데케미칼 보유 예금은 4조원이다.
롯데그룹은 최근의 석유화학 업황 침체로 인해 발생했다는 입장인데, 정작 화근은 10년 전의 부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시선이 있다.
2010년대 초반 들어 석유화학업계는 공급과잉 우려에 시달렸다. 중국과 중동의 설비 증설이 본격화되면서다. 이에 석유화학사들의 공급과잉 상태가 이어졌고, 이는 제품 마진 축소로 이어졌다. 롯데케미칼 EBITDA는 2011년 2조원에 육박했지만 2012~2014년엔 1조원 미만이 되며 현금창출력이 약화했다.
당시 일부 채권 투자자들이 상환 안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장치를 롯데케미칼에 요구했고 이자보상배율 조건이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일부 투자자 내부 투자 기준에 맞춘 것이란 시각도 있다. 어쨌든 통상 채권의 기한이익상실(EOD) 사유로 부채비율 하락, 신용등급 하락 등이 포함되는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란 평가다.
이후 롯데케미칼 회사채 발행 때도 해당 조건이 포함되다가 작년 하반기에야 사라졌다. 롯데그룹은 이번 사안을 계기로 기존 채권에서도 해당 조건을 삭제하는 안을 추진할 예정이다. 다만 코로나 팬데믹 시기 실적이 호황이고 발행사로서 입지가 공고할 때 미리 조건 변경에 나서지 않은 이유가 의아하다는 지적도 있다.
롯데그룹의 진화로 일단 루머는 해프닝으로 마무리되는 상황이지만 롯데케미칼의 근원적 경쟁력을 어떻게 찾을 것이냐 하는 시장의 의문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경기 부진이 장기화하며 석유화학 업계의 과증설 고민도 길어지고 있다. 롯데케미칼은 각종 금융 기법을 활용해 유동성을 확보하고 있지만 당장의 업황 부진을 이길 방도는 마땅치 않다. 사업부 매각이나 해외 자산 정리 등 군살 빼기 작업도 기대만큼의 성과가 없었다. M&A에 따른 차입금 부담도 있다.
과거 일부 기업들도 회사채 디폴트 문제가 발생해 채권자들의 동의를 받은 적이 있으니 이번에도 문제가 커지지 않을 것이란 시각이 있다. 그러나 보다 높은 신용등급과 사업 안정성을 가진 롯데케미칼에서 이런 해프닝이 일어났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보기 어렵다. 루머가 남긴 상흔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번 사안이 향후 롯데케미칼 신용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관심사다.
한 채권업계 관계자는 "이번에 교차부도가 날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앞으로 신용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가 관심사가 될 것"이라며 "신용평가사들이 당장 어떤 움직임을 보이진 않더라도 시장 참여자들의 우려를 고려하지 않을 순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