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케미칼 회사채 재무약정 위반 파장
日 미즈호은행 등 '우호세력'이 족쇄 됐나
10년 방치한 재무 약정 조항이 뇌관으로
채권단 회의서 일본계 자금과 해법 찾을지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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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그룹의 유동성 위기설이 시장을 강타했다. 소문의 발단은 롯데케미칼의 회사채 재무약정(커버넌트) 위반인데, 시장에서는 이번 위기의 근원이 10년 전 일본 금융권과의 관계에서 비롯됐다는 얘기가 안팎에서 나온다. 위급할 때마다 자금을 조달해오면서 '우호 세력'으로 여겨졌던 일본계 자금이 발목을 잡은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롯데케미칼이 올해 3분기 실적을 발표한 후, 국내외 채권단 사이에서 다급한 움직임이 감지됐다. 미국법인 가동 중단으로 1000억원가량의 손실이 발생, 부채가 눈덩이처럼 늘면서 이자보상배율이 4.3배까지 떨어졌기 때문이다. 롯데케미칼의 이자보상배율의 경우 EBITDA(상각 전 영업이익)를 이자비용으로 나눈 것으로 책정해뒀다.
롯데케미칼 공모 사채와 외화 차입금에는 이자보상배율을 5배 이상 유지해야 하는 약정이 있었다. 그런데 올해 실적으로 이 재무약정을 위반하는 요건이 성립됐다. 특히 공모 사채의 경우 채권단이 기한이익상실(EOD)을 선언하면, 나머지 전 회사채들도 채무불이행(디폴트)에 접어들 수 있다.
롯데케미칼 채권단 중 한 곳이자, 일본 3대 은행 중 한 곳인 미즈호은행은 롯데그룹의 우호 세력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올해 3분기 기준 미즈호은행의 롯데케미칼 장기 차입금은 2255억원에 달한다. 롯데케미칼이 발행한 누적 2조원 규모의 공모사채 중 상당 수를 미즈호은행이 인수한 것으로도 전해진다.
롯데그룹은 미즈호은행의 관계를 잘 이용해 왔다. 최근 롯데건설은 본사 사옥을 담보로 미즈호은행에서 3000억원 규모의 자금을 조달했다. 지난해 일진머티리얼즈 인수를 위한 1조7000억원 규모 신디케이트론에서도 미즈호은행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국내 KDB산업은행을 비롯해 신한·국민·우리·하나·SC은행 등 7개 금융사들의 참여도 일본 자금시장의 낮은 금리와 롯데그룹의 일본 내 자산을 근거로 미즈호은행이 물꼬를 텄던 것으로 전해진다.
시장에서는 이런 '우호적 관계'가 오히려 족쇄가 된 현실을 두고 역설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국내 회사채 시장에서 이자보상배율 같은 재무약정 조항을 넣는 경우는 드물다. 통상 부채비율 정도만 제한하는 것이 관행이다. 반면 일본 금융기관들은 내부 투자 원칙상 이런 까다로운 조항이 필요했고, 당시 롯데케미칼은 우호적 관계를 앞세워 이를 수용한 것으로 시장은 보고 있다.
2016년 국정농단 국정감사 사태 이후 롯데그룹은 '한국기업'임을 강조하며 일본계와 선을 그었다. 채권단도 국내 비중을 늘렸지만, 일본식 재무약정 조항은 그대로 뒀다. 당시는 호황기였고 부진에 빠지더라도 과거의 석유화학 사이클상 큰 문제될 것이라 보지 않았다는 게 시장의 분석이다.
실제로 올해 7월에도 롯데케미칼은 미즈호은행 대출에서 이자보상배율 유지 조항을 위반했다. 당시는 웨이버(유예)로 넘어갔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 공모사채의 경우 전체 채권의 교차부도(크로스 디폴트) 가능성까지 거론되면서 시장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이번 채권단 회의에서는 재무약정 위반에 대한 웨이버유예가 논의될 예정이다. 다만 증권업계에서는 단순 웨이버로는 근본적 해결이 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지금처럼 화학 업황이 개선되지 않는 상황에선 매 분기마다 재무약정 위반으로 인한 채권단 회의가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자보상배율 조항의 삭제가 핵심 과제가 될 전망이다. 결국 시장에서는 일본계 채권단의 대응에 주목하고 있다. 미즈호은행을 비롯한 일본계 투자자들이 사태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지만, 일본 금융기관은 내부 투자 원칙상 이자보상배율 조항이 통상적인 탓에 삭제 합의까지는 난항을 겪을 수도 있다.
한 증권사 커버리지 임원은 "일본 금융기관들은 회사채 투자를 일반적인 채권이 아닌 기업여신(대출)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회사채에도 대출 수준의 재무약정을 요구한다"며 "10년 전 조항을 관행적으로 유지해온 것도 있지만, 이를 없애기 위해선 일본계 금융권도 내부 회의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시일이 걸릴 수 있다"고 말했다.
롯데케미칼 측은 "당시 재무약정은 10여년 전 화학 업황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체결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확인이 어렵다"고 전했다.
이번 롯데케미칼 재무약정 사태는 한 차례 소동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지만, 국내 기업들엔 해외 자금 조달 시 금융 관행의 차이를 더 세밀히 살펴봐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시장에서는 이번 사태가 롯데그룹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일본계 자금이 필요할 때마다 우호 세력으로 활용하면서도, 정작 한국기업임을 강조할 땐 선을 그어야 했던 애매한 입장이 '10년 동안 방치된 일본식 재무약정'이란 시한폭탄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단순한 재무 리스크를 넘어, 롯데그룹이 마주한 근본적 숙제를 드러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