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환권 행사 시점 모르는데 공시하라니"…사전공시제도에 얼어붙은 EB시장
입력 2024.12.05 07:00
    제도 시행 후 자사주 제외 EB 거래 사라져
    "교환권 행사 시점 예측 불가" 실무진 골머리
    국내 대기업 계획 백지화…대안 찾기 '비상'
    IB업계 "현행 제도상 활용 불가능" 한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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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내부자 지분 매각 사전공시제도(이하 블록딜 사전공시제) 시행으로 교환사채(EB) 시장이 고사 위기에 처했다. 올해 7월 제도 시행 이후 그간 기업들의 자금조달 수단으로 활용됐던 EB 발행이 자사주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전무한 상황이다. 

      모호한 규제와 현실성 없는 공시 요건으로 '규제 공백'이 발생하면서, 실무진들이 EB 발행 자체를 포기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EB는 발행사가 보유한 특정 주식을 사채권자가 미리 정한 가격에 교환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된 채권이다. 주식을 담보로 낮은 금리에 자금을 조달할 수 있어 기업들이 선호해왔다. 특히 대기업들의 계열사 지분 매각이나 구조조정 과정에서 유용한 파이낸싱 수단으로 활용돼왔다.

      그러나 블록딜 사전공시제가 지난 7월 전면 시행되면서 EB 시장은 얼어붙었다. 현행법상 EB 발행과 취득은 공시 대상에서 제외되지만, 교환권 행사에 따른 매각은 사전공시가 필요하다. 문제는 EB의 특성상 언제 교환권이 행사될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금융권 실무진들은 기업들의 잇따른 문의에 답을 주지 못해 난감한 상황이다. EB 발행을 검토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지만, 현행 제도 하에서는 해결책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 대형 증권사 임원은 "매일 기업들과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찾아보지만 결국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며 "원래 EB 발행 수수료가 적지 않은데 이마저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해외 IB들의 반응도 다르지 않다. 글로벌 투자은행들은 한국 기업들의 EB 발행 문의에 대해 현행 제도 하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내비치고 있다. 일부는 현지법인들을 통해 국내 기업들의 발행 가능성을 타진해보지만, 본사로부터 어렵다는 답변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자사주 외 EB 발행은 중단된 상태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교환사채의 발행과 취득은 공시 의무가 없지만, 교환권 행사에 따른 매각은 사전공시 대상"이라며 "투자자의 교환권 행사 시점을 예측할 수 없어 공시 시기 결정이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에 실무진들은 여러 우회 방안을 모색했으나 모두 막힌 상태다. 교환권 행사 가능성이 있는 시점마다 공시하는 방안도 검토됐지만, 투자자들이 수용하기 어려워 결국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제도 시행 이후 3개월간 시장은 공회전 상태라는 평가다. LG그룹과 카카오그룹 등 계열사 지분을 활용한 EB 발행을 검토했던 곳들도 계획을 접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 때문에 연말 자금수요가 집중되는 시기에 주요 조달 수단이 막히면서 기업들의 부담이 커지고 있다. 대기업들이 구조조정과 지배구조 개선 과정에서 EB를 핵심 수단으로 활용해왔다는 점에서 우려도 깊어지는 모습이다.

      금융투자업계는 EB 특성을 고려한 별도의 가이드라인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일정 요건을 갖춘 경우 공시 의무를 면제하거나, 교환권 행사 시점에 맞춰 공시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보완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금융 당국의 제도 개선이 이뤄지지 않는 한, EB 시장은 당분간 자사주 발행으로만 명맥을 이어갈 전망이다. 개인투자자 보호라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기업들의 정상적인 자금조달까지 막는 것은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게 시장의 중론이다.

      한 금융 전문 변호사는 "교환사채의 특성을 고려한 별도의 공시 기준이나 예외 조항이 필요하다"며 "현재처럼 모호한 상태로는 정상적인 시장 기능이 마비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