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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전문직종의 인력 확대 정책은 도입 초기 늘상 업계의 저항을 받기 마련이다. 업계 입장에선 소위 '밥그릇'이 늘어나는 게 달가울 리 없다. 시장에 공급이 확대되면 가치가 하락함에 따라 임금이 줄어든다. 생존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현재진행형인 의정 갈등이 대표적이다. 벌써 10개월째 이어지고 있지만, 접점을 찾지 못했다. 필수과 기피현상·지방 의료 공백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정부와 무작정 증원하는 것은 의료품질 저하 등 부작용이 더 클 것이라는 의료계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 가운데 최근 회계사의 증원 문제도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다.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하고도 수습기관을 찾지 못한 '미지정 회계사'들은 최근 22년 만에 처음으로 트럭시위를 하며 단체행동에 나섰다. 회계사가 정식 자격을 갖추기 위해선 회계법인과 기업 등 지정 기관에서 2년간의 수습기간을 거쳐야 한다.
미지정 회계사 문제가 대두된 이유는 금융위가 올해부터 회계사 선발인원을 크게 늘린 탓이다. 금융위는 2020년부터 2023년까지 4년간 회계사 최소선발인원을 1100명으로 유지해오다, 지난해 1250명으로 대폭 확대했다. 업계에서는 올해 미지정 회계사의 수를 200명 안팎으로 추산하고 있다.
한국공인회계사회(이하 한공회)는 회계사 권익 보호를 위해 즉각 행동에 나섰다. 금융위의 내년도 회계사 선발인원 발표 전인 지난달 6일, '공인회계사 적정선발인원에 관한 연구' 중간결과를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한공회측은 내년 적정 선발 인원을 836명~1083명으로 밝혔다. 기존(1250명)보다 10% 이상 줄여야 하는 셈이다.
한공회측이 발빠르게(?) '중간' 결과를 발표했던 이유는 내년도 선발인원과 관련해 금융위를 압박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 금융위는 최근 내년도 회계사 최소 선발인원을 역대 최대 인원을 선발했던 올해보다 50명 줄어든 1200명으로 결정했다.
한공회의 압박이 먹히지 않았던 이유는 명확하다. 금융위가 회계사 공급 확대 정책을 선회하지 않은 이유는 '비회계법인'의 수요에 있었던 반면, 한공회측은 철저히 '회계법인'의 관점에서 적정 선발인원을 산출했기 때문이다.
한공회는 당시 공인회계사 255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응답자의 절반 이상인 55%가 내년부터 2030년까지 연간 선발인원이 850명을 밑돌아야 적정 수준이라고 답했다. 응답자의 98%는 같은 기간 최소 10% 이상 줄여야 한다고 답했다.
올해 빅4 회계법인(삼일·삼정·안진·한영)의 채용 규모는 842명이다.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절반 이상이 빅4 회계법인 채용 규모만큼만 회계사를 뽑아야 한다고 답한 셈이다.
애시당초 이해당사자인 회계사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가 큰 의미를 갖기도 힘들지만, '국내 회계사는 빅4 회계법인 회계사들 뿐'이라는 결론만 도출할 뿐인 설문조사 결과가 장기적 관점에서 정책을 관장하는 금융당국에 먹혀들리도 만무했다.
금융위가 올해, 그리고 내년에도 회계사 공급 확대 기조를 유지하는 이유는 비회계법인의 회계사 채용수요 때문이다. 회계법인이 갈수록 채용규모를 줄이는 것과 달리, 비회계법인의 회계사 수요는 해를 거듭할수록 늘고 있다.
올해 금융위는 지난해 수요조사를 실시하지 못했던 한국거래소 등 금융 유관기관과 정부부처 및 공공기관에 대한 수요조사를 추가로 진행했다. 조사 결과, 비회계법인에 대한 회계사 수요는 지난해보다 늘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비회계법인들은 회계사가 필요하지만, 지원을 하지 않아 인력을 채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와 관련, 미지정 회계사들은 회사가 경력직 회계사만 원한단고 반론한다. 또한 신입으로 지원하더라도 미지정 회계사들은 회사가 잠재적인 회계법인 이직 소요로 판단해 채용을 꺼려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경력 회계사들이 회계법인에서 일반 기업으로 이직하는 경우도 드물다. 급여 차이가 큰 까닭이다. 통상 빅4 회계법인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회계사의 경우, 입사 4~5년차가 되면 1억원 수준의 연봉을 받는다. 일반 기업에서 동일한 연차에 회계법인 수준의 연봉을 맞춰줄 수 있는 곳은 극히 드물다.
금융위는 회계법인과 비회계법인 사이의 회계사 급여 차이가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한 불균형을 장기간 방치한 영향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정책 일관성 차원에서 1년 만에 회계사 채용 규모를 다시 줄이기보다는,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다.
한 금융당국 관계자는 "회계법인의 수요에 맞춰 회계사를 선발하게 되면 상장회사와 금융유관 공공기관 등 비회계법인에는 영원히 회계사가 공급될 수 없을 것"이라며 "공급 확대 기조 초기에는 다소간의 잡음이 발생할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회계사 공급과 수요를 맞추는 과정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결국 장기적으로 회계사 공급 확대는 불가피한데, 올해 미지정 회계사 인력이 내년으로 이월되는 것을 고려해 내년도 채용규모를 소폭 줄이는 것으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한국공인회계사회 차원에서 미지정 회계사들이 수습기간을 채울 수 있도록 자체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또한 빅4 회계법인과 협의해 인턴 기간을 정식 수습기간으로 인정받도록 하는 방안도 검토중이다. 금융위 역시 관련 방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공회가 준비하고 있는 방안이 현실화한다면, 미지정 회계사의 내년 이월 인원은 줄어들 전망이다.
최근의 회계사 증원을 둘러싼 논란을 보고 있자면, 의대 증원을 둔 당정 갈등과 상당 부분 닮아 보인다.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증원 정책을 추진하는 정부와 금융당국의 주장을,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된 이해당사자 '밥그릇 지키기' 논리로 맞받아치는 것은 국민의 지지를 받기 힘들다.
의대 증원은 교육의 질을 하락시켜 의료 품질 저하로 이어질 것이란 의료계의 주장과, 회계사 증원은 교육기관 부족에 따른 감사품질 저하로 이어질 것이란 회계업계의 주장은 그 논리마저 비슷하다. 다만 이해당사자가 아닌 외부의 시선에서 이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당장 코앞으로 다가온 내년도 의대 증원 찬반과 별개로, '의사수 확대'라는 아젠다 자체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는 수차례 설문조사를 통해 확인됐다. 지난 5월 정부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실시한 '의대 증원 방안 관련 국민 인식조사'에서 응답자 72.4%가 의대 증원에 찬성했단 설문조사 이후, 진행된 모든 설문조사에서 의대 정원 찬성이 반대를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법조계에서는 이미 한 차례 이러한 갈등을 겪은 바 있다. 현 시점에서 법조계의 사례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지난 2009년 로스쿨 개원을 앞두고 법조계는 정원 확대에 반대했다. 논리는 지금의 의사, 회계사들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변호사시험이 사법고시를 완전히 대체한 2012년 이후 10여 년 새 변호사 수는 두 배 이상 늘었지만, 현재 법률서비스 품질 저하를 지적하는 비판은 작다. 외려 공급 확대에 따라 지방 도시에 개업하는 변호사 수가 늘며, 소비자의 접근성이 높아졌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크다.
입력 2024.12.06 07:00
취재노트
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4년 12월 05일 15:16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