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모 시장 냉각에 상장 철회도 줄이어
내년초 상장 준비 기업 셈법 복잡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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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주 과열의 원인으로 지목됐던 초일가점 제도가 힘을 잃고 있다. 초일가점을 받아 최대한 많은 물량을 확보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던 기관투자자들이 더이상 수요예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있는 까닭이다. 일각에서는 과열됐던 공모주 시장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과정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최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기관투자자들은 '관망 모드'에 들어갔다. 초일가점을 받는 대신 수요예측 마지막날까지 상황을 지켜보며 신중히 주문을 넣는 분위기로 빠르게 변화한 것이다. 수요예측 첫날 주문을 넣었어도 마지막날 주문을 취소하거나 가격을 정정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초일가점은 수요예측 마지막날 주문이 몰리는 현상을 막기 위해 첫날 주문을 넣는 기관에 가점을 부여하는 제도다. 여기에 더해 지난해 6월 상장일 가격 상승 제한폭 확대 정책이 겹치자 수요예측 첫날 최대한 많은 주문을 넣어 상장 첫날 매도하는 기관들이 늘어났고, 공모주 시장은 하루짜리 단타 시장이 됐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당초 초일가점은 타 기관의 눈치 보지 않고 적정 수준의 가격을 발견할 시간을 충분히 주겠단 의도였지만, 여러 기관이 한 주라도 더 받기 위해 첫날 '묻지마' 참여를 하는 부작용이 발생한 것이다.
공모주 필승론이 공모주 필패론으로 빠르게 변화한 것은 지난 10월 중순부터다. 국내 증시 부진과 개인투자자들의 자금 이탈 등이 겹치자 상장 첫날 주가가 공모가를 하회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다. 실제 10월 24일부터 상장한 공모주 중 더본코리아와 위츠를 제외한 종목들은 모두 공모가를 하회하고 있다.
한 공모주펀드 운용역은 "예전 같았으면 가뿐히 희망밴드 상단을 초과해 공모가가 확정될 만한 기업들도 하단이나 하단 미만에서 공모가가 결정되는 경우가 생기고 있다"며 "이젠 더이상 초일가점이 의미가 없어졌고, 어떻게 보면 이제야 과열됐던 공모주 시장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평가했다.
기관투자자들의 투심이 얼어붙자 상장 계획을 철회하는 기업들도 늘어났다. 10월 케이뱅크를 시작으로 동방메디컬, 미트박스글로벌, 씨케이솔루션, 아이지넷, 오름테라퓨틱 등이 줄줄이 상장을 철회하고 내년으로 공모 일정을 연기했다. 해당 기업들은 수요예측 결과 대부분의 기관들이 희망밴드 하단이나 하단 미만에서 주문을 넣은 것으로 파악된다.
내년 1분기 상장을 준비하는 기업들도 셈법이 복잡해졌다. 시장에선 내년 상반기에도 공모주 시장이 반등하기 어렵다는 전망이 나오면서다.
내년 초 증시 입성을 기다리고 있는 LG CNS, SGI서울보증, 케이뱅크는 과거에도 공모주 시장 침체를 이유로 상장 일정을 미룬 바 있다. 기업가치 조 단위 기업들이 내년 상반기에 상장이 몰리면 수급이 분산돼 또다시 흥행에 참패할 수도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시장 상황으로 인해 초일가점 제도가 무력화되며, 해당 제도를 유지할 필요성이 있느냐에 대한 논의도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IPO 시장 관계자들은 지난해부터 이어진 '묻지마 공모주 장세'의 배경 중 하나로 초일가점을 지목해왔는데, 수요예측 정상화의 명분을 내세운 금융당국과 어쨌든 최대한 물량을 확보하려는 기관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며 논의에 진척이 없었던 까닭이다.
다른 자산운용사 운용역은 "초일가점 제도가 당초 안정적인 공모주 청약이라는 본래 취지와는 달리 '묻지마 청약'의 핵심 인센티브가 된 것은 사실"이라며 "본래 2일이었던 수요예측 기간을 연장한 것이 큰 의미가 없다는 지적이 나오는 상황에서 초일가점 제도 역시 원점 재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