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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지금 우리나라 재계에 퍼진 위기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 출범은 불과 한 달도 남지 않았는데 관세를 앞세운 보호무역 정책은 점차 현실화하고 있다. 미국 정부를 정무적으로 대응 할만한 카운터파트가 전무한 상태이기 때문에 기업들은 사실상 각개전투를 펼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연말부터 치솟기 시작한 환율이란 변수는 어떤 후폭풍이 돼 돌아올지 예단하기 어렵다.
곳간을 걸어 잠그고 확장 대신 관리모드로 돌입한 기업들의 현금 확보 경쟁은 올해 초부터 점점 치열해 질 것으로 보인다. 당장 연초부터 금융권, 특히 은행으로부터 자금 조달을 추진하고 있는 기업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국내 한 제조기업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우리나라 기업들 상당수는 신년 상반기까진 그나마 버틸 체력이 있다. 진짜 돈줄이 마르기 시작할 하반기에 금융회사를 찾아가면 우릴 만나주기나 하겠나"며 "1분기 내 연중 필요한 자금 조달을 모두 마무리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는 기업들의 자금 경색 위기가 확산하기 전 타기업들 보다 미리 현금을 확보해 두겠단 전략과도 같다. 프로젝트파이낸싱(PF) 위기가 다시 재현된다면 건설회사들의 건설회사들의 자금 소요가 크게 늘어나고 금융권의 문턱이 높아질 것이란 우려도 이 같은 판단의 배경이 되고 있다.
환율이 불안정한 상태를 감당하지 못할 중소·중견 기업들이 금융권에 손을 벌릴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도 선제적인 자금 확보에 노력하는 요인이다.
국내 한 지주회사 관계자는 "반도체, 철강, 자동차, 건설, 제약·바이오 등 어떤 산업군도 긍정적인 전망을 하기 어려운 시점이다"며 "본격적으로 기업들의 실적이 꺾이기 시작하면 금융사를 태핑하는 기업들이 늘어날텐데, (우리회사는) 미리 주채권은행을 만나 기업 대출 한도를 최대한 열어줄 것을 요청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치솟는 환율은 국내 증시의 부담으로 고스란히 작용하고 있다. 외국인들의 이탈이 가속화하는 시점에서 일부 기업들은 오너들의 주식담보대출 비율도 걱정해야하는 처지에 놓였다. 대기업들 오너들이야 당장 마진콜을 걱정하지 않겠으나, 중소·중견 기업 오너들의 상황은 조금 다르다. 결국 미리 은행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다.
과거에는 전환사채(CB)를 비롯한 메자닌 발행이 급증했다. 최근 기업들의 주가가 급격히 하락하면서 기존 사채에 대해 주식으로 전환하거나 조기 상환을 요구하는 수요가 늘어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사실 사채 투자자들이 현금으로 상환 받는 대신 주식으로 전환하는 상황은 기업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한다. 그렇다고 기업은 사채 상환을 위해 메자닌 발행을 무수히 늘릴 수도 없고, 새해도 지난해와 같은 투자 수요가 있을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기도 하다. 적게는 수 백억원에서 수 천억원대의 투자금을 상환해야하는 기업들의 자금 소요가 올해 크게 늘어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국내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2023년엔 제약·바이오 기업들의 밸류에이션이 꺾이기 시작하면서 한동안 메자닌 발행으로 대규모 투자금을 끌어왔던 바이오 기업들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며 "올해는 바이오 기업뿐 아니라 코스피·코스닥을 상장 기업들의 밸류가 전반적으로 빠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채무(메자닌) 상환에 대한 기업들의 부담이 크게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물론 기업들이 드라이파우더가 넉넉한 사모펀드(PEF)를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은 열려있다. 또 제 2금융권, 일부 증권사로부터 고금리의 자금을 빌릴 수 있는 전략도 최후의 수단으로 고민할 수 있다. 급전이 필요한 기업과 PEF 및 일부 금융기관들의 거래에서 끝맺음이 깔끔하지 못한 사례가 종종 나타난다는 점은 기업들에 부담이기도 하다.
결국 아직까진 납득할만한 '재무제표'를 내세워 최대한 조용히, 빨리, 그리고 비교적 안전하게(?) 돈을 빌리려는 기업들의 수요가 늘어나는 상황. 대기업, 중소중견 기업을 막론하고 기업 재무담당자들은 새해 초 은행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입력 2025.01.0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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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5년 01월 01일 07:0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