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사고 여파에 얼어붙은 증권가 인사…유임만 돼도 '안도'
입력 2025.01.03 07:00
    취재노트
    제재 이슈에 주요 증권사 임원들 보직 걱정…'깊어진 시름'
    승진보다는 '현상유지' 기대...실적 호조 무색한 연말 인사
    • "각종 금융사고와 어려운 영업환경 등으로 현 직위 유임만 돼도 안도의 한숨을 쉬는 분위기입니다."

      지난 연말 인사철을 견뎌낸 한 증권사 임원의 토로다. 증권사들은 2024년 역대급 실적을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크고 작은 금융사고에 연루되며 줄줄이 제재를 받을 위기에 처했다. 이미 그 직전해 주요 증권사 상당수가 이미 세대교체를 진행한 터라, 연말 인사에서는 특히 승진자가 줄고 현상 유지에 초점이 맞춰진 모습이다.

      31일 증권업계에 따르면 미래에셋증권을 시작으로 한국투자증권, 삼성증권, KB증권, 신한투자증권, 키움증권, 하나증권 등이 연이어 인사를 단행했다. 주요 5개 증권사(미래·삼성·한국·NH·키움)의 4분기 영업이익은 1조725억원으로 2056억원의 적자를 기록한 전년 동기대비 큰 폭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이 중 상당수가 제재 이슈에 엮인 터라 인사 발표 전까지 긴장감이 감돌았다는 후문이다.

      증권가에서는 최근 크고 작은 금융사고가 잇따르면서 증권사 임원들의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부동산 PF 담당 임직원의 사익 추구, 채권형 랩·신탁 돌려막기 등 각종 불법행위가 적발되면서 직접 연루되지 않은 부서와 임원들까지 '불똥(?)'이 튈 수 있다는 우려가 퍼졌다. 금감원이 금융투자 부문 수시검사를 134회 실시하겠다고 밝힌 것도 이 같은 불안감을 키우는 요인이다. 이는 작년(98회) 대비 36% 증가한 수치다.

      가장 큰 주목을 받은 곳은 1300억원대 손실이 발생한 신한투자증권이다. 지난 10월 ETF LP(유동성공급) 운용부서에서 추가 수익을 얻기 위해 선물을 매매하는 과정에서 거액의 손실을 봤다. LP는 ETF 시장에서 매수·매도 양쪽에 주문을 넣어 호가 스프레드를 좁히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수익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여기에 임직원들이 이를 은폐하기 위해 계약을 위조한 것으로 알려지며 사태가 일파만파 커졌다.

      인사 직전까지 신한투자증권 임직원들의 불안감은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신한금융지주가 경영관리를 비롯해 내부통제, 홀세일본부 등 조직 상당수를 전면 교체할 것이란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이다. 인사에 앞서 신한투자증권은 담당 본부장과 그룹대표를 보직 해임했고, 이번 인사에선 이례적으로 경영관리총괄을 신설하는 등 대대적인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NH투자증권은 2023년 11월 발생한 '파두 사태' 여파가 이어졌다. 매출 급감 사실을 숨기고 기업가치를 부풀려 상장한 파두와 IPO 주관사인 NH투자증권 관련자들이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송치됐다. 이와 관련해 IPO 담당 사업부 대표가 다른 부서로 이동했고, 해외법인장이 이를 대체하는 인사가 이뤄졌다. 호실적 속에서도 책임을 물은 셈이다.

      키움증권도 전년과 달리 승진자가 급감했다. 2023년엔 상무 이상 승진자가 10명에 달했지만 2024년 연말에는 1명에 그쳤다. SG발 주가조작 사태, 영풍제지 사태 등 각종 이슈에 엮인 임원들이 적지 않아 승진 인사에 부담을 느꼈다는 분석이다. 엄주성 키움증권 사장은 SG증권발 주가 폭락 사태 후속조치 질의를 위해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하기도 했다.

      채권형 랩·신탁 돌려막기 건으로 제재를 받은 증권사들의 대응도 분주하다. KB증권과 하나증권은 해당 사업부 영업정지와 임직원 중징계 등 제재를 받았고, 이홍구 KB증권 사장은 책임을 물어 경징계 처분을 받았다. 제재 수위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증권사들은 임직원 징계 수위를 최소화하는 데 안간힘을 쓰는 것으로 전해진다. 중징계를 받으면 금융권 재취업이 제한돼 사실상 업계에서 퇴출될 수 있어서다. 이에 이와 관련된 승진인사도 보수적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증권가에선 사고 없이 무사히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것만으로도 안도하는 분위기다. 불법행위에 대한 처벌과 책임은 당연하지만, 연루되지 않은 직원들에게도 이러한 분위기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체감상 승진 인사가 확연히 줄어든 것 같다"며 "이런 어려운 시기에 승진보다는 더 일할 수 있게 돼 다행"이라고 말했다.

      다만 퇴직연금 부문에서는 예외적으로 승진자가 늘었다. 증권사들이 내년 IRP(개인형퇴직연금) 시장 선점을 위해 조직을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이면서다. 여러 증권사 관계자는 "퇴직연금 시장이 새로운 격전지가 될 것"이라며 "이에 대비해 관련 조직과 인력을 보강하는 차원에서 승진자가 나왔다"고 설명했다.

      신년 증권사 영업환경은 녹록지 않은 상황이다. 기준금리 인하 기조가 투자심리 회복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지난 하반기 증시가 하락하는 등 영업환경이 비우호적이다. 높은 경기 불확실성이 지속되면서 자금시장이 위축될 가능성도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