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등급 AA사도 조달 조건 악화
신년사에 드러난 재무 위기 긴장감
구조조정 실행력이 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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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신년사를 통해 '고강도 쇄신'을 전면에 내세웠다. 전년도 신년사에서 ‘위기 속 기회’를 강조했던 것과는 결이 다른, 이례적으로 강한 어조다. 표면적으로는 글로벌 경제 불확실성과 국내 저성장을 언급했지만, 실상은 그룹 전반의 자금조달 여건 악화와 핵심 계열사들의 실적 급락이 고심거리다.
지난해 롯데그룹 핵심 계열사들의 실적 부진이 뚜렷했다. 롯데케미칼은 작년 3분기에만 4136억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석유화학 산업 수익성 지표로 꼽히는 에틸렌 스프레드(에틸렌 가격에서 원료인 나프타 가격을 뺀 금액)는 손익분기점인 300달러를 지속적으로 하회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자회사 LC타이탄에 수조원대를 투자했지만, 수익성 개선은 요원한 상황이다.
롯데쇼핑 역시 누적적자 5540억원을 기록했고, 지난해 3분기 연결 기준 부채총계 20조원에 부채비율도 190%에 달하는 등 재무건전성이 급격히 악화됐다. 2017년부터 적자를 지속하고 있는 상황에서, 올해부터 2028년까진 국내외 대형 쇼핑몰에 1조원 이상 규모의 투자가 예정돼 있다. 차입금 상환도 이러한 대규모 투자가 마무리된 이후로 미뤄질 전망이다.
그룹의 자금조달 능력도 예전같지 않다. 시장에서는 최근 롯데케미칼이 진행 중인 1조4000억원 규모의 자금조달 계획이 이를 방증한다고 보고 있다. 롯데케미칼은 지난해 10월 미국 생산법인 롯데케미칼루이지애나(LCLA) 지분을 활용해 6600억원가량을 조달했고, 올 상반기에도 인도네시아 자회사(LCI) 지분을 활용해 주가수익스와프(PRS) 방식으로 약 7000억원을 조달할 계획이다.
IB업계에선 특히 LCLA의 PRS 계약 조건이 이례적이라고 평가한다. AA 신용등급의 대기업이 3개월 단위 단기 채권 발행과 관련된 모든 신용위험을 떠안았기 때문이다. 시장에서는 증권사가 부담해야 할 리스크를 기업이 수용했다는 점에서 롯데그룹의 자금조달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해석이 나온다. 아직 인도네시아 법인을 활용한 PRS의 세부 조건은 확정되지 않았지만, 시장에선 루이지애나 건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분위기다.
IB(투자은행)업계 한 관계자는 "계약 만료일까지 자산 매각이 안되면 조달자금 전액을 날리는 조건까지 수용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며 "AA등급 기업이 이런 극단적 리스크를 떠안았다는 건 정상적인 회사채 발행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자금조달이 절박했다는 방증"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당시 롯데케미칼이 회사채 7500억원 수준의 조달을 시도하면 시장에서 소화하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이에 대해 롯데케미칼 측은 "PRS 계약 만기일까지 자산 매각에 실패할 경우 계약을 연장하거나 다른 금융사와 협의를 할 예정"이라며 "다만 인도네시아 법인 PRS는 다른 구조를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런 위기감은 신년사 톤의 급격한 변화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신년사에서 신 회장은 바이오로직스의 송도 플랜트, 에너지머티리얼즈 출범, 헬스케어 플랫폼 등 신사업 성과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반면 올해는 구체적 성과 언급 없이 "사업 포트폴리오 고도화"라는 추상적 표현만 사용했다.
ESG 경영이나 디지털 전환 등 미래 성장동력에 대한 언급도 대폭 줄었다. 작년의 경우 'AI 트랜스포메이션'을 강조하며 생성형 AI 등 기술 투자 확대를 약속했지만, 올해는 "유의미한 성과가 나올 수 있도록 더욱 힘써야 한다"는 원론적 언급에 그쳤다.
글로벌 시장 공략도 마찬가지다. 작년 베트남 하노이 복합몰을 구체적 성과로 내세웠던 것과 달리, 올해는 "현지화에 집중하라"는 추상적 당부만 남았다.
대신 재무건전성 제고와 생산성 향상이 전면에 등장했다. 신 회장은 "재무 전략을 선제적으로 수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업을 진행해 재무건전성을 높여야 한다"며 "불필요한 업무나 효율성을 저해하는 요소를 찾아 제거하라"고 주문했다.
실제로 그룹 차원의 구조조정은 이미 시작된 분위기다. 롯데쇼핑은 비수도권을 중심으로 백화점과 마트의 대대적인 점포 정리에 나섰다. 부산 센텀시티점을 시작으로 지방 소재 백화점과 마트 10여개를 순차적으로 매각한다는 계획이다. 특히 백화점의 경우 상위 3개점(잠실ㆍ본점ㆍ부산본점)이 전체 매출의 45%를 차지할 정도로 양극화가 심각해, 비효율 점포 정리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롯데그룹이 56조원 규모의 부동산 자산을 내세우며 시장을 달래고 있지만, 실제 유동화는 쉽지 않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잠실 월드타워(시가 4조원대)나 소공동 호텔(7조원대 추정) 같은 우량 자산은 그룹의 상징성을 이유로 처분이 어렵고, 실적 부진에 시달리는 백화점ㆍ마트 등 비핵심 자산은 시장의 냉담한 반응에 발이 묶였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일례로 올해 롯데그룹은 L7 강남, 롯데 시티호텔 명동, 롯데호텔 울산 등을 '패키지 딜' 형태로 시장에 내놓았지만 거래가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매물로 나온 부산 센텀시티 백화점도 매출이 감소 추세인 데다 인근 신세계 센텀시티점과의 경쟁에서 밀리면서 대형 매수자 찾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투자업계에서는 이번 구조조정이 2020년대 초반 언급과 결이 다르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그간 정치권과 노동계의 반발을 의식해 점진적으로 진행하던 구조조정이, 최근 유동성 위기설이 불거지면서 오히려 과감한 자산 정리의 명분을 얻게 됐다"고 분석했다.
결국 신년사가 예고한 '고강도 쇄신'의 성패는 롯데그룹의 실행력에 달렸다는 평가다. 롯데그룹은 현재 구조조정과 동시에 미래 먹거리 발굴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아야 하는 상황이다. 바이오와 배터리 소재 등 신사업은 아직 가시적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고, 기존 사업의 실적은 계속해서 악화되고 있다. 여기에 자금조달마저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이번 구조조정은 그룹의 생존이 걸린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게 시장의 중론이다.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최근의 자금조달 조건을 보면 롯데그룹이 당장의 이자비용 절감에 집중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PRS 계약에서 극단적 리스크까지 감수한 것을 보면, 구조조정 시행의 타이밍도 앞당겨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