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금 1.5兆 순매수, 외국인도 귀환...환율 하향 안정세
20일 美 트럼프 취임 이후 정책ㆍ발언마다 자산 가격 널뛰기
결국 관세 부과 시점ㆍ강도가 변수...국내 지표 영향력은 하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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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급하게 트위터(현 X)를 설치하고 트럼프 대통령 계정을 팔로우(구독)한 뒤 알람 설정을 해뒀던 일이 기억나네요. 미국 대통령이 날 것의 메시지를 실시간으로 뿌리고, 그 메시지에 따라 자산의 가격이 널뛰기하는 건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습니다. 그 시대가 또 돌아왔군요."(한 자산운용사 주식운용본부장)
모든 매크로 변수를 압도하는 '슈퍼 변수' 트럼프가 돌아왔다. 취임 첫 날부터 내놓은 행정명령과 발언에 미국과 국내 증시를 비롯, 금리, 환율, 국제 유가, 가상화폐 가격까지 출렁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전 임기때 도전적인 발언을 던지고, 그에 따른 혼란과 불확실성을 본인의 협상력으로 삼아왔다. 당분간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트럼프 트레이드'의 시대가 열렸다는 평가다.
연초 이후 지난 21일까지 코스닥 지수는 7% 상승하며 글로벌 증시 중 상승률 1위를 기록했다. 코스피 지수도 5% 상승하며 최상위권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미국 나스닥 지수는 2.3%, S&P500지수는 2.8% 상승에 그쳤고, 일본 니케이225, 중국 상해종합지수 등 주요국 증시는 연초 이후 하락세를 보였다.
한국 증시의 무서운 상승세는 결국 '가격' 이슈였다는 게 증권가의 대체적인 평가다. 계엄 사태 후폭풍 등으로 증시가 급락한 지난해 12월 9일 기준 코스피의 12개월 선행 주가수익비율(PER)은 7.9배, 주가순자산비율(PBR)은 0.82배에 불과했다. 코스피의 지난 10년 평균 PER은 10배, PBR은 1배 안팎에서 형성돼왔다.
연초 이후 증시 상승의 일등공신은 국민연금을 비롯한 연기금이었다. 연기금은 연초 이후 코스피에서 1조3000억원을 순매수하며 지수를 끌어올렸다. 지난해 미국 증시가 20% 이상 급등하고, 국내 증시는 하락하며 자산 '리밸런싱'(비중조정)을 통해 국내 증시 비중을 높였을 거라는 분석이다. 여기에 지난해 순매도세로 일관하던 외국인도 소폭이나마 순매수로 돌아섰다. 1500원선을 위협하던 환율도 1400원대 중반으로 되돌아오며 힘을 보탰다.
한 증권사 트레이더는 "미 증시는 2년 연속 20% 이상 상승하며 상승 동력을 소진한 상황이었고, 국내 증시는 반도체 업황 둔화ㆍ무역분쟁 재개ㆍ계엄 및 탄핵 등 정치적 혼란을 가격에 모두 반영한 상황이었다"며 "미 증시는 더 오르기 어렵고 국내 증시는 더 빠지기 애매한 상황이 되자 일단 국내 증시로 자금이 유입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문제는 20일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며 이 같은 '흐름'이 다시 의미가 없어졌다는 점이다. 발언 하나하나, 정책 하나하나에 온갖 자산이 휘둘리는 상황이 돌아온 것이다.
21일 국내 증시가 이 같은 상황을 단면적으로 드러냈다. 트럼프가 취임 첫 날 서명한 행정명령 중 관세 관련 내용이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글로벌 통화 대비 달러의 강세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는 1% 급락했고, 원달러환율도 장중 20원 가까이 내리며 달러당 1430원 초반에 접근했다. 국내 증시도 일제히 상승세를 보이며 오랜만에 2550선에 다다랐다. 미국 국채 10년물 가격은 1% 하락하며 강세를 보였고, 한국 국채 10년물 금리는 2% 넘게 하락하며 장중 2.79%대에 진입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행정명령 서명 이후 기자회견에서 "2월1일 멕시코와 캐나다에 25% 관세 부과를 검토하겠다"고 발언했다. 국내 증시는 오전 상승폭을 모두 반납했다. 원달러환율도 1443원으로 되돌아갔다. 한국 국채 10년물 역시 2.81%까지 상승하며 거래를 마감했다.
22일에도 이 같은 변동성은 지속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2월 1일 중국에 대한 1`0% 관세를 검토하고 있다'는 발언을 내놓자, 중국 증시는 일제히 하락 출발했다. 국내 증시 역시 오전 중 한때 영향을 받았으나, 취임 전 언급했던 60% 관세보다 낮은 수준의 부과 방침에 상승세를 이어갔다.
이달 초 급락하며 개당 9만달러 초반까지 내려왔던 비트코인 가격은 이날 새벽 트럼프 행정부가 가상화폐 관련 태스크포스(TF)를 설치한다는 소식에 다시 10만달러를 돌파했다. 오라클ㆍ소프트뱅크와 함께 인공지능(AI) 관련 인프라에 집중 투자하겠다는 정책에 미국 나스닥이 상승했고, HD현대일렉트릭 등 국내 전력인프라주 등이 강세를 보였다. 전기차 의무화 정책 폐기로 인해 LG에너지솔루션 등 이차전지주는 큰 폭의 하락을 피하지 못했다.
국내 변수는 증시와 금리 등 자산 가격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다. 지난 16일 오전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예상과 달리 금리를 동결했지만 증시는 상승했고, 국채 금리는 일제히 하락했다. 21일 한국은행이 올해 국내 경제성장률 전망을 1.9%에서 1.6~1.7%로 낮출 예정이라는 소식에도 원달러 환율은 하락했고 증시에도 큰 반응이 없었다.
향후 시장을 바라보는 전망 역시 '트럼프 변수'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엇갈린다.
KB증권은 반도체 등 IT 대형주에 긍정적인 전망을 내놨다. 트럼프 정부의 관세정책은 다시 원달러 환율을 끌어올릴 수 있지만 2016년 트럼프 1기 정부때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진정될 것이며, 그로 인해 외국인 매도세가 진정되면 반도체 등 초대형주에 유리한 장세가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은택 KB증권 연구위원은 "트럼프는 결국 관세를 발표할 것이고 이는 다시 원달러를 끌어올릴 수 있지만, 불확실성 해소의 힘이 더 강할 수 있다"고 부연했다.
경계의 시선도 여전하다. 한지영 키움증권 연구원은 "한국, 캐나다 등 자유무역협정 체결 국가는 관세율을 0%로 적용 받고 있지만, 이들 모두 대미 무역흑자 상위국가라는 점에서 관세 리스크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전망"이라며 "특정 국가에 대한 관세 부과를 넘어 보편적인 관세가 현실화될 경우, 지난 2018~2019년 무역분쟁이 그 이상의 강도로 재발될 가능성도 열려 있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