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주 52시간 '반도체 예외론' 부상하는 배경에 삼성 불안감
D램 최전선에서 힘 잃으며 中 레거시 추격에 그대로 노출된 상황
전영현 부회장 지시로 D램 재설계…"잠잘 시간도 아껴야 할 정도"
차세대 HBM 수주는 물론 삼성전자 자본력 근간과 직결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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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이 중국의 창신메모리(CXMT) 탓에 수익성이 크게 휘청이는 장면을 두고 시장은 여러 걱정을 쏟아내고 있다. 원래 같은 조건이라면 타격을 입는 순서는 마이크론, SK하이닉스에 이어 삼성전자 순이어야 한다. 기술 로드맵부터 생산능력, 비용구조, 공정효율, 자본력, 인재풀까지 삼성전자가 경쟁사를 압도하던 시절엔 중국 업체가 물량을 쏟아내도 감히 타격을 입히기 쉽지 않았다. 어차피 D램 시장은 삼성전자가 쥐고 흔드는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CXMT에 발목 잡히는 장면은 결국 삼성전자가 반도체 최전선에서 얼마나 힘을 잃었는가를 드러내주고 있다는 평이다. 현재 CXMT는 구형 DDR4 D램에서 저가 공세에 나서고 있을 뿐이다. 고부가 제품인 DDR5로의 세대교체는 2023년부터 시작됐다. 이미 작년 중 DDR4 판매비중을 넘어섰다. 삼성전자가 고부가 격전지에서 힘을 못 쓰고 있으니 중국 업체로 인한 타격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구도가 펼쳐졌다는 것이다.
정치권이 반도체 연구개발 노동자를 주 52시간 노동상한제 적용제외 대상에 포함하느냐를 두고 논의에 들어간 것도 이 같은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된다. 주 52시간제와 같은 규제까지 손보지 않으면 삼성전자가 종전 반도체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짙어서다.
반도체업계 한 관계자는 "전영현 부회장 지시대로 공정별 D램 설계를 처음부터 다시 하고 있는데, 반도체 산업의 구조적 특성상 잠잘 시간마저 아껴야 할 정도로 시간에 쫓길 수밖에 없다"라며 "이 때문에 삼성전자가 주 52시간제와 같은 규제 개선을 상당히 강력하게 요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작년 연말부터 1a 공정 이후 D램 제품의 재설계에 돌입한 것으로 알려진다. 14나노미터(nm) 급인 1a 공정 D램은 삼성전자와 마이크론, SK하이닉스 3사가 4년 전 경쟁하던 과거의 전장이다. 이미 작년 SK하이닉스를 시작으로 삼성전자 역시 12nm 이하 1c D램 시대에 진입했으나, 전 부회장이 반도체 수장으로 복귀하면서 재설계를 지시했다. 1a 공정 이후 만들어진 D램 성능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전 부회장의 지시 자체는 지난 수년 D램 설계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직시하고 근본적인 처방을 내린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범용 D램 설계가 잘못되면 이를 위로 높이 쌓아올린 고대역폭메모리(HBM) 역시 고객사 요구 성능을 충족할 수 없다. 업계에선 전 부회장이 1a D램 재설계를 통해 HBM3 공급 역량부터 바로잡고, 향후 1c D램 기반의 HBM4 경쟁에 나서려는 것으로 보고 있다.
문제는 차세대 공정 개발 경쟁이 쉴틈 없이 진행되는 가운데 기존 D램을 재설계하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점이다. 경쟁사가 계속해서 양산 노하우를 쌓고, 수십조원의 이익을 남겨 다음 사이클을 대비하는 동안 삼성전자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구도가 되기 때문이다. 올해 DDR5 시장 수요는 전체 D램 시장의 75% 안팎까지 늘어날 전망인데, 시장에선 SK하이닉스의 1c 공정 수율이 70~80%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반도체에서는 단 한 번 공정 격차가 발생하는 것만으로도 다음 사이클 진입이 아예 불가능해질 가능성도 있다.
격차를 좁히려면 당분간 D램 설계를 위한 연구개발 시간을 경쟁사 수배 수준으로 대폭 늘리는 것은 물론 관련 비용도 합리적인 수준에서 통제해야 한다. 자연히 주 52시간제와 같은 규제가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현재 D램 설계는 내년 이후 엔비디아와 같은 대형 고객사의 차세대 HBM 수주 성과와 직결돼 있다. 삼성전자가 목숨을 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얘기다.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재계가 주 52시간제와 같은 규제를 문제 삼는 배경에는 자신들의 실패와 무능을 가리려는 의도도 상당 부분 있겠지만 지금 삼성 반도체에 한해선 얘기가 좀 달라 보인다"라며 "뒤로 중국이 따라붙는 상황에서 내년까지 HBM 대응을 못하면 삼성전자 D램이 통으로 밀린다. 그러면 향후 파운드리는 물론 다른 신사업에 대응할 역량도 전에 없이 떨어지게 된다"라고 말했다.
업계 안팎에는 삼성전자 R&D가 주 52시간제와 같은 족쇄에서 풀려나더라도 반도체 경쟁력 복원 작업이 성공할 것이라 확신하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많다. 현재 삼성전자가 추진하고 있는 작업이 그만큼 쉽지 않다는 인식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