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반복업무 부담 줄었지만
장기적으로 저연차 자리 흔들
챗GPT 활용 업무 결과물 월등
AI 의존하면 '사고 역량' 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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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대형 회계법인들이 인공지능(AI)과 접점을 늘려가고 있다. AI를 활용해 업무의 정확성과 효율성을 높이고 있는데 생각보다 효과가 크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이러다보니 벌써부터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AI가 기초적인 업무를 전담하게 되면 저연차 회계사들의 설 자리가 좁아질 것이란 걱정이다.
빅4 회계법인들은 글로벌 회계펌과 파트너 관계를 맺고, AI 분야에서도 이들의 영향을 받고 있다. 다만 해외와 한국의 환경이 다르다 보니 이제까지의 AI 관련 성과는 국내 법인들이 독자적으로 일군 것이 많다. 일례로 작년 삼일회계법인이 자체 개발한 생성형 AI 번역 모델은 국제기계번역대회(WMT) 특허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감사 분야에선 챗봇이나 자료 검색과 검수 등 다양한 영역에서 AI가 쓰이고 있다. 삼일회계법인은 'AI Accountant'를 도입했고, 삼정회계법인도 자체 검색시스템 '오딧세이+'를 운영하고 있다. 이런 AI 기반 도구를 활용하면 K-IFRS 감사기준서와 해석서 등을 일일이 찾아야 하는 수고를 덜어준다.
한 회계법인 감사 담당 직원은 "외부에 공유할 수 없는 자료를 학습한 챗봇이 있기 때문에 업무상 필요한 내용을 물어보기 용이하다"며 "감사기준서 내용도 챗봇에 묻기만 하면 알아서 찾아 정리해주니 편하다"고 말했다.
AI는 세무나 자문, 컨설팅 등 비감사 영역에서도 활용된다. 거래명세서나 송장 등 증빙 자료를 자동으로 인식해 데이터화하는가 하면, 과거 자료를 스스로 입력하고 실적 전망을 내는 도구도 있다. 컨설턴트의 머리를 싸매게 했던 PT 자료를 대신 작성해줄 AI 도구도 개발 중이다.
회계법인들이 AI를 적극 활용함에 따라 '노동집약적' 업무 부담은 상당 부분 줄어들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경영진들은 업무의 정확도와 신속성, 효율성이 높아짐에 따라 남는 역량을 어떤 고부가가치 영역에 쏟을지 고민하고 있다.
중장기적으로 AI가 사람의 일자리를 잠식할 수 있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당장은 AI 생태계를 구축하는 과정이라 더 많은 자료를 축적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의 오류를 잡기 위해 인력이 더 필요하다. 그러나 AI 도구들의 정확도가 높아지고 사람의 판단이 불필요한 영역에서 맹활약하게 되면 그 일을 하던 인력의 효용은 준다는 것이다.
회계사들은 도제식 교육에 따라 경험을 쌓는다. 커리어 초반부의 업무는 고객사에서 주는 자료를 받아서 분석하고 기존 자료와 기준과 다른 점이 없는지 확인하는 등 반복 작업이 많다. 비감사업무에서 데이터를 찾아 분석하고 전망을 내는 것도 비슷하다. 사람이 AI보다 잘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AI는 이미 회계법인 안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대화형 AI 챗봇 챗GPT는 많은 직원들이 사용하고 있다. 적은 비용으로 기대 이상의 결과물을 도출해주고, 직장내 괴롭힘 같은 노동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 투자설명서 앞의 면책조항(Disclaimer)은 이제 챗GPT가 더 잘 쓴다는 평가다. 최근 한 회계법인은 삼행시 경연을 벌였는데 수상자 모두 챗GPT를 활용한 결과물을 제시해 파트너들이 놀랐다는 후문이다.
다만 AI 의존도가 높아지면 단순 업무를 하는 저연차 회계사의 입지가 좁아진다. 회계법인의 인건비 부담은 줄겠지만 장기적으론 독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데이터를 도출하고 활용하는 방법, 더 나아가 업의 본질 자체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사람이 줄어들어서다. '사고하는' 역량이 약해지면 회계법인 전체 기능도 약화할 수밖에 없다.
다른 회계법인 비감사 파트너는 "주니어 직원 몇 명을 일주일간 투입하는 것보다 챗GPT와 반나절 대화할 때의 결과물이 더 좋다"며 "아직 업계에 인력 조정 논의가 가시화하진 않았지만 단순 업무는 AI가 저연차 회계사 자리를 빠르게 잠식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