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침체·친환경 사업 위축에 소진 난항
공격적으로 나선 2차전지 기업도 관심 줄어
정부 주도 시장 활성화 없이는 위축 불가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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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ESG(환경·사회·거버넌스) 채권 발행 후 적절한 사용처를 찾는 것이 기업들의 고민으로 떠올랐다. 기업들의 자금 조달 수단으로 각광받던 때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다. 경기 둔화와 규제 강화로 ESG 사업 추진이 어려워지고, 투자자들의 관심도 줄어들면서 ESG 채권 발행 자체가 위축됐다는 분석이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ESG 채권 발행 규모는 64조7190억 원으로, 전년(75조9500억 원) 대비 15% 감소했다. 녹색채권 발행은 1조원가량 늘었지만, 사회적 채권은 11조 원이나 줄었다.
3~4년 전 ESG 채권 발행이 활발했던 시기에는 금융사는 물론 일반 기업들까지 앞다투어 ESG 채권을 발행했다. 특히 2021년에는 정부 주도로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자들이 ESG 채권 투자를 본격 확대하면서 자산운용사들도 ESG 펀드를 조성하며 투자에 나섰다. 2021년 1분기 민간기업의 ESG 채권 발행량은 2020년 연간 발행량의 두 배를 넘어설 정도로 급증했다.
2021년 초 LG화학이 민간기업 역대 최대 규모인 8300억원의 ESG 채권을 발행해 시장 분위기를 주도하기도 했다. 해당 자금은 탄소중립, 전지소재, 신약개발, 동반성장 등 지속가능 및 신성장 동력 분야에 투입됐다.
특히 2차전지 기업들은 글로벌 배터리 생산시설 투자 등 친환경 사업 수요가 꾸준했던 만큼, ESG 채권 시장이 위축되기 시작한 때에도 주요 발행 주체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최근 전기차 시장이 캐즘(성장 정체)에 접어들면서 이마저도 예전만큼 활발하지 않다는 평가다. 가장 적극적으로 녹색채권을 발행했던 LG에너지솔루션조차 발행한 채권 중 일부 자금을 아직 소진하지 못한 상태다.
한 채권업계 관계자는 "공격적으로 ESG 채권을 발행했던 일부 기업들이 자금을 다 사용하지 못해 고민하고 있다"며 "ESG채권으로 조달한 자금은 정해진 용도로만 써야 하는데, 친환경 및 신재생에너지 사업 투자가 줄면서 집행이 지연되고 있는 곳들이 있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기업들이 ESG 경영 명분을 내세우며 유행처럼 ESG 채권을 발행했지만, 이제는 실익이 줄어들면서 선뜻 나서지 않는 분위기다. 경기 위축과 수익성 악화로 인해 친환경 사업 등 ESG 경영에 대한 기업들의 관심이 낮아진 것도 원인으로 지목된다.
금리 부담도 ESG 채권 시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20~2022년 코로나19 기간에는 경기 둔화 속에서도 기준금리가 역사적 저점을 유지하면서 기업들이 비교적 부담 없이 ESG 채권을 발행할 수 있었다. ESG 채권은 일반 회사채보다 금리가 낮아 조달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기준금리 인상과 함께 금리 부담이 커지면서, 기업들이 일반 회사채를 통한 자금 조달을 더 선호하는 분위기다.
또한 ESG 채권은 특정 분야에만 사용해야 하고, 사전 인증 및 사후 관리 비용이 추가로 발생한다. 이에 따라 친환경 사업 투자가 필요하더라도, 기업들은 비용 절감 차원에서 일반 회사채 발행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현재 ESG 채권 발행이 지속적으로 이뤄지는 곳은 금융지주 및 카드사 등 금융업권이 중심이다. 캐피탈이나 카드업계의 경우 일반 여전채보다 낮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소상공인 금융이나 전기차·수소차 등 친환경 차량 금융상품에 활용하는 등 비교적 사용처를 확보하기 쉽기 때문이다.
기업들의 ESG 채권 발행이 다시 활발해지기 위해서는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관측이다.
2019년 국민연금이 의결한 ‘책임투자 활성화 방안’에서 ESG 통합 정책이 제시되면서 관련 투자가 본격 확대됐다. 이후 국민연금의 총 운용자산 대비 책임투자 비중은 2021년 13.7%, 2022년 43.1%, 2023년 56.7%로 지속적인 성장을 기록했다. 그러나 최근 ESG 투자에 대한 정부 차원의 정책적 지원이 줄어들면서, 이전과 같은 강한 드라이브는 부족하다는 평가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기업들의 자금 조달 수요는 높지만, ESG 채권을 통한 조달의 실익이 크지 않아 발행이 줄고 있다"며 "국민연금이 공격적으로 나서야 기업과 투자자 모두 ESG 채권 시장에 대한 관심을 되찾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