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C·PE 등 투자업계도 난감 "기술특례상장보고 투자했는데 엑시트 막혀"
'기술특례보다 일반 상장'…특례상장 난이도 변화에 업계 IPO 전략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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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거래소의 기업공개(IPO) 상장 심사가 한층 까다로워지자 증권업계가 상장 예심 통과 기준을 담은 이른바 '비공식 백서(?)'를 만들어 대응하기 시작했다. 거래소는 공식적으로 상장 예비심사(예심) 관련 가이드라인이 없다는 입장이지만, 업계에서는 제조업체일 경우 매출 300억원, 기술특례기업은 100억원 이상 등의 비공식 기준이 사실상 적용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이런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기업들이 예심 단계에서 잇따라 탈락하면서 업계에서 이제는 암묵적인 상장 심사 기준처럼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10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올해 들어 11개 기업이 상장 예비심사를 자진 철회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6곳)보다 거의 2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다. 철회 기업 중 상당수는 2023년 기준 적자를 기록한 기업들이었고, 기술특례상장 기업들도 예외 없이 심사를 철회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기술특례를 추진했던 자율주행 데이터 솔루션 기업 '에이모', 신약개발 바이오 기업 '레드엔비아', IoT 플랫폼 기업 '메를로랩' 등이 예심을 통과하지 못했다. 이들 기업은 2023년 순손실이 각각 356억원, 168억원, 28억원을 기록했다. 기존 기술특례상장이 기업의 실적보다 기술력과 성장성을 중심으로 심사됐다면, 이제는 실적이 부진하면 상장 자체가 어려워진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한 증권사 IPO 부서 관계자는 "특례상장이더라도 매출 100억원을 충족하지 못하면 예심을 통과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업계에 자리 잡았다"며 "거래소뿐만 아니라 기술성 평가 기관들 역시 심사 기준을 한층 강화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실제로 금융당국은 지난 1월 '상장폐지 제도 개편안'을 발표해 코스피와 코스닥의 퇴출 요건을 각각 매출 300억원, 100억원 미만으로 상향했다. 퇴출 요건을 강화해 증시 신뢰도를 제고하는 취지지만 업계에서는 상장 기준도 함께 높아져 IPO 심사 자체가 엄격해졌다는 반응이다.
한 IPO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예심 승인율이 약 80% 수준이었지만 지난해부터 60%대로 하락했다"며 "올해는 금융당국이 더욱 엄격하게 심사를 진행하겠다는 기조를 밝힌 만큼 승인율이 지금보다 더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러다보니 증권사들 사이에서는 강화된 상장 심사 경향을 반영, 일반 상장은 200억원, 기술특례상장은 100억원, 이익 미실현(테슬라 요건) 상장은 300~400억원이 안정적인 통과 기준이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이는 증권사들이 심사 흐름을 파악해 유추한 일종의 가이드라인으로 업계에서는 이를 '비공식 백서'로 받아들이며 실질적인 심사 대비 지침으로 활용하고 있다.
아울러 기술특례상장보다 일반 상장을 선호하는 분위기도 형성됐다. 기술특례상장은 일반 상장보다 수수료율이 두세 배 높지만, 심사 통과 가능성이 낮아지면서 상장 실패에 대한 부담이 커졌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최근 시장에서는 기술력이 뛰어난 기업보다 연 매출 200~300억원 이상의 기업을 상장하기 훨씬 수월하다"며 "증권사 입장에서도 상장 실패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실적이 안정적인 기업을 주관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변화는 증권사뿐만 아니라 벤처캐피털(VC), 사모펀드(PEF) 운용사 등 초기 투자자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존에는 기술기업이 일정 수준의 기술력과 성장성을 갖추면 기술특례상장을 통한 빠른 엑시트(투자금 회수)가 가능했으나 이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이익을 동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VC 관계자는 "투자 기업의 기술특례상장을 목표로 투자를 진행했는데 최근 특례상장이 어려워지면서 엑시트 방안을 다시 검토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IPO 심사 및 상장 관련 정보를 얻기 위해 거래소 출신 사외이사나 고문을 영입하는 관행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최근 거래소는 자사 출신 인사가 증권사로 이동해 상장 심사 대응을 지원하는 관행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최근 한 증권사가 이와 관련해 거래소로부터 공식적인 경고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시장에서 공공연하게 돌고 있다.
이와 관련해 거래소 측은 "코스닥 상장 관련 표준 제도에서 정한 기업 매출 기준(일반 100억원, 벤처 50억원)을 바탕으로, 업계가 자연스럽게 상장 적정 매출 수준을 논의하게 된 것으로 이해한다"며 "시장 상황에 따라 매출이 30~40% 변동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증권사들이 상장 직후 관리 종목 지정 가능성을 줄이려는 취지에서 이러한 기준을 자체적으로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