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주주 올라 美 함정 시장 진출 교두보 마련
HD현대와 방산 주도권 경쟁…글로벌 입지 강화 포석
이사회 반대 속 단계적 접근, 적대적 M&A 가능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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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그룹이 호주 조선·방산업체 오스탈(Austal) 인수에 실패한 지 약 1년 만에 지분 투자로 전략을 선회하며 미국 함정 시장 진출을 위한 발판 마련에 다시 나섰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이 동맹국 방산기업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가운데, 경쟁사인 HD현대중공업과의 글로벌 방산시장 주도권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독자적인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에 박차를 가하는 모양새다.
18일 공시에 따르면 한화그룹은 호주 자회사인 'HAA No.1 PTY LTD'를 통해 오스탈 지분 9.9%를 장외거래로 직접 매입한다. 인수 가격은 총 1억8340만호주달러(한화 약 1655억원)로, 종가 대비 16%의 프리미엄을 붙인 가격이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와 한화시스템이 호주 자회사의 유상증자에 각각 642억원, 2027억원씩 출자했다.
한화그룹은 현지 IB(투자은행) 자든파트너스(Jarden Partners Ltd) 등을 통해 9.9% 지분에 대한 총수익스와프(TRS) 계약을 체결했다. 호주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FIRB)의 승인을 얻게 되면, TRS 계약을 실제 지분 소유로 전환해 19.9%까지 지분을 늘릴 계획이다. 이 경우 한화는 현재 최대주주인 타타랑 벤처스(18.4%)를 제치고 오스탈의 최대주주로 올라서게 된다.
이날 한화그룹 관련 주가는 일제히 상승해 신고가를 달성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전일 대비 5% 이상 오른 78만1000원, 한화시스템은 10% 오른 4만2000원에 거래됐다. 한화오션 주가도 6% 이상 상승해 8만1000원대를 넘어섰다.
앞서 한화는 지난해 오스탈 지분 100%를 약 10억달러(한화 약 9000억원)에 인수하려 했으나 오스탈 이사회의 반발 및 미국·호주 규제 당국의 승인 불확실성으로 무산됐다.
오스탈 현 최대주주인 타타랑벤처스는 호주 최대 철광석 기업 포르테스큐 메탈스그룹의 재산을 기반으로 한 패밀리 오피스다. 당시 오스탈 측은 한화의 실사 허용 조건으로 "미국이나 호주 정부가 인수를 거부하면 한화가 500만달러(한화 73억원)의 해지 수수료를 지불해야 한다"는 조항을 내세워 협상이 결렬됐다. 그만큼 오스탈 이사회 내부에서 한화그룹의 인수를 적극적으로 저지하려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결국 한화는 올해 전략을 수정해 단계적 지분 확보로 접근법을 바꿨다. 투자업계에서는 한화의 이번 행보가 미국 함정 시장 진출이라는 목표를 향한 우회 전략으로, 지난해 인수 무산 이후 오히려 더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결단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오스탈은 글로벌 선박 및 특수선 건조 업체로, 미국 해군 연안 전투함 생산을 맡으며 이름을 알렸다. 본사는 호주에 있지만 미국 앨라배마 조선소에서 핵잠수함을 건조하는 등 주요 사업은 미국에서 벌이고 있어 한화의 미국 함정 시장 진출에 중요한 교두보가 될 수 있다.
한화그룹 내부에서 오스탈 인수 추진은 김동관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부회장이 주도하고 있다. 김 부회장은 방산 사업 중에서도 잠수함 분야에 집중하며 미국과 호주 시장 진출을 통한 글로벌 방산 기업 도약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화그룹은 오스탈 이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향후 공개매수(TOB)를 통해 경영권 확보를 시도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 것으로 전해진다.
IB업계 한 관계자는 "한화오션을 중심으로 한 미국 사업 확장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미국 특수선 시장 진출에 대한 그룹의 의지가 명확해졌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한화그룹의 적극적 행보는 HD현대중공업과의 방산시장 경쟁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으로도 해석된다. HD현대중공업 역시 오스탈 인수를 적극 검토했던 만큼, 한화로서는 이번 지분 확보가 더욱 절실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화와 HD현대는 글로벌 방산 수주를 위한 '원팀' MOU를 체결했지만 실질적인 협력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앞선 폴란드 잠수함 수주전에선 한화오션이 단독 입찰에 나서며 미국 함정 시장에서 경쟁력 강화를 위한 독자 행보를 이어갔다. 한화그룹 내부에서도 HD현대중공업과의 비교 구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증권사 한 관계자는 "한화그룹은 특수선 사업부에서 HD현대중공업과의 비교를 탈피하기 위해 오스탈 인수를 통한 시장 포지셔닝을 추진하고 있다"며 "필리조선소가 상선 위주의 소규모 조선소이기 때문에, 오스탈까지 확보하면 호주·미국 양국에 거점을 확보해 미국 함정 사업에서 확실한 경쟁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번 오스탈 지분 확보 시도는 지난해와 달리 규제 리스크에 대한 부담이 현저히 줄어든 환경에서 이뤄지고 있다. 지난해 당국의 승인 거부 시 한화가 거액의 위약금을 부담해야 하는 리스크가 걸림돌이었다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이 동맹국 방산 기업들과의 협력을 적극 장려하면서 한화의 부담도 크게 줄었다.
다만 한화그룹이 최대주주가 된다고 해도 경영권 확보는 별개의 문제다. 미국과 호주 정부의 승인 외에도 적대적인 오스탈 이사회와의 관계가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이전의 인수 시도가 이사회의 반대로 좌절된 만큼, 이사회와의 협력을 강화하지 않는다면 적대적 M&A를 추진해야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화오션이 당장 오스탈 인수전에 뛰어들지는 않지만, 중장기적으로 협력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점도 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한화오션은 현재 LNG선, 해양 플랜트 등의 사업에 집중하고 있어 단기적으로 방산 분야에서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기 어렵다. 다만 한화그룹이 글로벌 방산 네트워크 확장을 목표로 하고 있는 만큼, 향후 오스탈과의 협력을 강화하거나 추가적인 투자 기회를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한화오션은 미국 함정 시장 진출을 위해 전략적 제휴를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화그룹 내에서도 한화오션의 방산 사업 강화를 위한 추가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는 만큼, 오스탈과의 협력 구조가 단순한 전략적 투자에서 실질적인 사업 파트너십으로 발전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화그룹 측은 "현재로서는 오스탈 인수 계획은 없으며, 전략적 투자에 무게를 두고 있다. 한화오션 역시 당분간 지분 투자보다는 협업 형태를 지속할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