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中 조선업 압박 강화하겠다지만 실현 가능성 따져봐야
국책은행은 신중 모드…“美 투자, 2차전지 전철 밟을 수도”
증권가는 미 조선업 재건 도와 추가적 딜 따낼 가능성 내다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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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조선업 부활을 위한 대규모 정책 지원을 예고하며 국내 조선사들의 미국 현지 진출이 빨라지는 모습이다. 하지만 국내 정책금융기관 사이에서는 미국 조선업 재건의 현실성에 대해 신중히 따지고 있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미국 시장 진출을 위해 가장 앞서 나간 건 한화다. 한화그룹은 지난해 미국 필리조선소를 인수한 데 이어, 최근 호주 조선사 오스탈(Austal)의 지분 9.9%를 매입하며 재인수에 나섰다. 지난 20일에는 3조6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단행하며, 해외 투자를 위한 자금을 마련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유상증자를 통해 모은 자금 중 8000억원 가량을 미국을 중심으로 한 해외 해양방산 및 조선 생산기지 확보에 투입할 계획이다.
현재 한화는 한국 거제 옥포조선소와 미국 필리조선소, 싱가포르 다이나맥조선소를 연결한 멀티야드(Multi-Yard) 전략을 실행 중이다. 여기에 오스탈이 보유한 미국 앨라배마주 조선소를 더해, 미국 해군 특수선 수주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복안이다. 그룹 차원에서 해외 조선소에 대한 지분 투자를 공격적으로 진행해 멀티야드 전략을 강화하고 있단 평가가 나온다.
HD현대 역시 미국 조선업 진출에 속도를 내고 있다. 그룹은 미국 본토 조선소 7~8곳에 대한 실사를 마쳤으며, 동남아 조선소도 검토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각에선 HD현대가 조선소를 인수한다면, 필리핀 수빅조선소가 유력하다는 관측도 나온다. 수빅조선소는 군함 건조 이력이 있는 데다, 전략적 요충지인 남중국해 주변에 위치해 미군 부대의 정비 거점으로 활용이 용이해서다. 정기선 수석부회장도 올해 초 미국 출장길에 올라 현지 파트너들과의 협력 확대에 나서며 미국과의 접점을 늘려가는 모습이다.
이에 대해 정부와 정책금융기관은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산업은행과 국정원 등 일부 기관은 미국의 조선업 재건 시나리오의 실현 가능성을 조선업계 전문가들에게 문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국책은행 한 관계자는 "미국 선박 전쟁(Ship War) 보고서를 두고 국책은행, 국정원에서 어떻게 봐야할지에 대한 문의가 지속되고 있다"며 "해당 내용에는 실현 가능성이 낮은 정책들도 포함돼있어 미국의 조선업 재건 가능성을 꼼꼼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지난 11일(현지시간) 미 하원 군사위 산하 소위원회는 미 조선업 관련 청문회를 열었다. 같은 날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Ship War' 보고서를 통해 중국 조선업을 제재하고, 한국·일본 기업의 미국 조선소 투자를 유도해야 한다고 밝혔다.
산업계에서는 'Ship War' 보고서에 담긴 주요 항목의 실현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특히 중국의 조선업 금융지원을 제재하겠다는 방안(2번 항목)은 실현가능성이 낮다는 평가다. 이어 동맹국에 캐파 증설을 요구하겠단 것(7번 항목)은 한국의 조선업체에 부정적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국책은행 관계자는 "미국이 말하는 건 중국 조선소에 들어가는 금융을 차단하겠다는 것"이라며 "미국계 금융기관인 시티은행 같은 곳이 중국 선박 프로젝트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겠다는 얘기지만, 이들이 중국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 자체가 크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이 유럽 금융기관까지 압박해 중국 발주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시도하겠지만, 성공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며 "만약 금융지원을 원천 차단한다 하더라도, 중국 조선업체의 시장 점유율이 40% 이상으로 내려갈 경우 한국과 일본 조선소가 나머지 물량을 소화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단기적으로 한국 업체들의 이익률이 올라가겠지만, 장기적으로 중국 정부 주도의 군민융합(MCF, Military-Civil Fusion) 전략을 막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평가다. 중국은 이미 군함 관련 계획을 자국의 정책대로 진행하고 있고, 미국이 일시적으로 타격을 준다해도 이를 감내할 수 있는 여력이 충분하다는 이유에서다.
한 조선업계 관계자는 "미국이 조선업을 중국만큼 키워내겠다는 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며 "그렇다면 오히려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조선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인도나 동남아에 조선업을 키우라고 압박할 텐데, 이 경우 인건비가 높은 한국 조선사들이 가장 먼저 타격을 입을 수 있다"고 밝혔다. 조선업 판도 변화를 신중히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미국 항구에서 중국산 선박을 다수 보유한 선사에 항만세(항세)를 부과하겠단 내용도 담겼다. 다만 이 경우 전 세계 해운 운임이 최소 5~6%가량 상승해 미국 내 물가 상승 압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해당 보고서에는 중국 국영조선소인 중국선박공업그룹(CSSC)를 포함한 중국 조선소들을 1~4단계 위험군으로 분류해 각각 견제해야 한다는 주장도 포함됐다.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 주도의 공급망 재편이 또 다른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과거 미국 정부는 인플레이션 감축법(IRA법)을 통해 보조금 지원을 약속하며 한국의 2차전지 기업들은 미국 내 대규모 설비 투자에 나섰지만, 현재는 수익성 악화와 수요 둔화로 투자 동력이 크게 꺾인 상황이다. 조선업 또한 비슷한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그럼에도 투자업계에서는 선제적으로 투자한 한화의 행보를 긍정적으로 내다보고 있다. 방산 기반 기업인 한화의 경우, 전통 조선업과는 달리 그룹 내 시너지를 극대화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한화의 경우 방산업을 기반으로 한 기업이라, 조선업 외에도 가지고 있는 카드가 많다"며 "군함 시장에서 수혜를 톡톡히 볼 수 있고, 미국의 조선업 재건을 도와준 뒤 한화솔루션을 통해 미국과 태양광 사업에서 협력하거나, 미국 LNG터미널 사업에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참여하는 등 부가적인 딜을 이끌어낼 요인들이 존재한다"고 밝혔다.
조선업계 안팎에서는 미국의 조선업 재건 계획이 실제로 성공할지 여부와 무관하게, 한국 기업 입장에서는 일단 시장이 열릴 경우 수주 기회를 잡기 위한 포지셔닝이 중요하다는 시각도 있다. 당장 실익이 불분명하더라도, 한발 앞서 참여하는 것이 이후 수주 경쟁에서 유리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장기적으로는 실익을 따져봐야겠지만, 향후 2년 정도는 국내 조선업체들이 확실히 수혜를 볼 것으로 보인다"며 "시장에서는 향후 1~2년간 군함 수주 및 MRO(유지·보수) 확대 관련 뉴스플로우가 이어질 가능성이 커 주가 측면에서도 상방을 열어둘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