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업 부진 속 연착륙 위한 뒤처리 수요만
PE도 보수적 움직임…결국 부담은 금융권에
성장보다 생존 집중…방어적 일감 늘어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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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들이 침묵을 깨고 움직이고 있지만 시장이 개선되고 있다 보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가득하다. 성장을 위한 투자보다는 부진한 사업장의 연착륙을 위한 움직임만 많은 탓이다. 성과가 부진하기로는 마찬가지인 사모펀드(PEF)들도 좋은 거래보다 덜 아플 거래를 찾느라 분주하다. 당분간 투자은행(IB)의 먹거리 대부분이 지난 5년의 뒷수습에 초점이 맞춰질 것으로 보인다.
1분기 자본시장의 주역은 단연 한화그룹이었다. 미국 증시마저 휘청이는 가운데 단신으로 국내 시장을 떠받쳤다. 아쉽다 평가가 있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3조6000억원 규모 유상증자도 국내에 몇 남지 않은 성장 산업이란 명분이 동력을 제공하고 있다. 잠시 주춤하던 그룹 주가는 다시금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반영하기 시작했다.
삼성을 비롯해 현대차와 LG까지 다른 대기업들도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부분 행보가 미래를 내다본 과감한 결단과는 거리가 있다는 평이다.
대형 증권사 한 대표는 "한화그룹을 제외하면 지금 대기업 중에 새로 뭔가를 해보겠다고 자금을 조달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며 "삼성SDI의 2조원 유상증자는 기존 수주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여러 방안을 검토한 끝에 나온 결과물이고 나머지 대기업들도 채권자와 재무적 투자자(FI), 수출 상대국을 달래기 위한 조달에 집중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지난 5년 국내에서 눈길을 끈 신사업들은 성과를 특정하기 어렵다. 유일하게 숫자가 나오는 듯하던 2차전지는 반등 시점을 점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수출 효자 자리를 지켜온 주력 사업들은 순차로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반도체 회복이 더딘 가운데 완성차, 석유화학, 철강 등 수출 품목 대부분이 미국 관세와 중국 추격에 포위됐다. 부동산에서 시작된 금융권 부실 자산도 정리되지 않은 데다 내수 기반 유통·소비재 시장은 쪼그라들 일만 남았다.
자연히 대기업 조달, 자문 수요 대부분은 급한 불을 끄는 데서 나오고 있다.
시한이 임박한 FI들의 청구서 부담 해소가 특히 두드러진다. ▲적격상장(Q-IPO) 조건이 붙은 사업장에 알짜 자회사를 이전(SK온·SK에코플랜트) ▲풋옵션(주식매수청구권)을 받지 않아 FI가 직접 매각 추진(11번가) ▲지분을 예정보다 일찍 되사오기(CJ올리브영) ▲공모자금으로 보장수익률을 보전(롯데글로벌로지스) ▲10여년에 걸친 분쟁 끝에 주식담보대출을 일으켜 정리(교보생명) 등 온갖 기법이 등장하고 있다.
부쩍 늘어난 일반 제조기업의 자본성증권(영구채) 발행, 대출과 다름없는 고금리 PRS(주가수익스왑) 계약 요청도 꾸준하다. 최근 공매도가 재개되면서 잠시 종적을 감췄던 교환사채(EB) 시장도 기지개를 켜려는 모습이다. 이도 저도 여력이 안 된다면 결국 핵심 부동산을 담보로 내주거나 헐값에 파는 수밖에 없다. 한때 유동화 창구로 각광받던 리츠시장은 대기업 진출이 늘어나면서 망가졌다는 진단이 나온다.
은행권 한 관계자는 "여신 한도를 꽉 채운 대기업들이 하나 둘 늘어가더니 기한이익상실(EOD) 우려에 웨이버(조건부 면제) 협상, 추가 담보권 설정 등 뒤처리 업무만 수시로 이어지고 있다"라며 "금융사 입장에선 돈은 안 되는데 위험 부담은 크고 얼굴까지 붉혀야 하는 거래들"이라고 말했다.
대기업 맞은편에서 구조조정 파트너십을 이룰 것으로 기대되던 대형 PE들도 불확실한 상태에 놓이고 있다. MBK파트너스의 홈플러스 회생절차 신청 후 포트폴리오 관리 실태나 회수 성과에 대한 각계의 점검이 이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1년 전만 해도 인프라 사업이라면 입찰 경쟁에 불이 붙었지만 올 들어 무리한 가격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기류가 감지된다.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홈플러스 회생절차 이전부터 대형 PE들 사이에서 진입가를 낮춰야 한다는 고민이 많았고 대기업과 관계에 기반한 거래에서도 합당한 수준까지 값을 깎기 시작할 것"이라며 "PE가 시원시원하게 쏴줄 수 없는 형편이면 대기업들이 결국 금융권 팔을 비틀려고 할 텐데 걱정이 많다"라고 말했다.
이런 시장 환경이야말로 메리츠금융의 사업 모델이 빛을 발할 타이밍이란 시각도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홈플러스 회생절차를 기점으로 평가를 유보해야 하는 분위기다. 메리츠금융 방식 벼랑 끝 영업의 지속가능성을 따져보던 경쟁 금융사들도 이번 사안의 결과를 주목하고 있다.
결국 당분간 IB 시장의 먹거리는 이해당사자들의 연착륙 설계와 분쟁 조율 등이 중심이 될 것이란 전망이다. 대기 중인 사업 조정과 회수 작업들이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이런 흐름을 뒤집기 어려울 것이란 우려가 많다.
IB업계 한 관계자는 "거래 성사 난이도가 올라가며 인건비도 못 건지는 사례가 늘고 있으니 차라리 조달, 승계, 분쟁 조정 등에서 일감을 찾는 게 나은 상황"이라며 "시장 수요 자체가 성장보다 생존에 쏠려 있어서 방어적 일감이 늘어나는 게 당연하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