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저수익 지방 자산인데…PF 자금 여력은 부족
큰손 국민연금은 3개월간 의사결정 공백 상태에 침묵
멈췄던 투심 살아날까…일각선 해외LP 엑시트 우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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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대기업들의 '몸집 줄이기'가 연일 이어지고 있지만, 정작 부동산 유동화 시장은 탄핵 정국으로 얼어붙은 상태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 결정이 나온 상황에서, 시장은 기관투자자(LP)들의 투자심리가 다시 움직일 수 있을지에 대해 관심이 쏠리고 있다.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엘리베이터(현대그룹), KT, KT&G, 롯데그룹, 신세계그룹, 이랜드그룹 등 주요 대기업들이 유동화하려는 부동산 자산 규모는 수십조원에 이른다. 기업 비핵심 자산 정리와 재무구조 개선을 위한 결정이지만, 정작 시장에서 이를 소화할 투자자들의 발길은 끊긴 상태였다.
현대차그룹은 서울 및 수도권 하이테크센터를 포함한 20~30여개 자산의 유동화를 검토 중이다. KT는 안다즈 강남, 소피텔 앰배서더 서울, 노보텔 앰배서더 동대문 등 5성급 호텔을 포함한 3조원 규모 유동화를 추진 중이다. KT&G도 이달 을지로타워 입찰을 시작으로 지방 부동산 매각을 가속화하고 있다.
롯데그룹은 롯데백화점 부산센텀시티점과 L7 홍대 호텔, 롯데건설 서초구 본사 건물 등을 매각 중이다. 신세계그룹은 하남 스타필드 지분 절반을 유동화하기 위해 LP들의 의사를 묻고 있다. 이랜드그룹 역시 올해부터 자산매각TF를 확대해 약 5000억원 규모 비영업 자산 매각에 속도를 내고 있다.
문제는 이런 대기업 매물 대부분이 수익성이 낮은 지방 자산이거나 추가 개발이 필요한 부동산이라는 점이다. 넓은 부지에 주차장이나 물류센터로 활용되는 곳들, 혹은 지방 영업점들이 대다수다. 이런 자산들은 디벨로퍼가 개발해서 가치를 높여야 하는데, 최근 정부의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제도 개선방안이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PF 제도 개선방안은 시공사의 자기자본비율을 20% 이상으로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한 대형 증권사 관계자는 "PF 개정안으로 디벨로퍼가 전체 에쿼티의 20~30%를 부담해야 하는데, 그 정도 자금력을 갖춘 곳은 국내에 몇 없다"며 "결국 연기금이나 공제회 같은 LP가 앵커 투자자로 들어와줘야 하는데, 이들도 탄핵 정국 이후엔 관망세를 취하고 있다"고 말했다.
LP들의 투자 결정을 막는 핵심 요인은 기대수익률의 괴리와 정치적 불확실성이다. 국내 주요 연기금과 공제회들의 대체투자 평균수익률 마지노선은 4.9% 수준으로, 이들은 부동산 투자에서 최소 8% 이상의 연간 캡레이트(순영업수익률)를 요구한다. 그러나 대기업들이 유동화하려는 자산 대부분은 이보다 훨씬 낮은 수익률을 보인다. 홈플러스 비수도권 매장 등을 비롯한 일부 자산의 경우 0%에 가까운 수준도 있다는 게 업계 평가다.
이러한 수익률 문제에 더해 탄핵 정국의 불확실성은 투자 결정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주요 LP들은 탄핵 결과가 나올 때까지 투자 결정을 보류해 왔으며, 일부는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당분간 한국 부동산 시장에 투자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좋은 흐름을 보이던 상업용 부동산 시장도 탄핵 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한 이후 약 한 달간 셀다운(기관투자자 재매각)이 거의 중단된 상태였다. 블랙스톤, 싱가포르투자청(GIC) 등 글로벌 투자사들도 한국의 정치적 불안정성을 이유로 일부 투자를 보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증권사 부동산금융 담당 임원은 "대기업들이 작년 연말부터 비핵심 자산 구조조정을 선언했지만, 계엄 선포에 탄핵까지 겹치면서 시장이 올스톱됐다"며 "국민연금(NPS)에 기대는 게 최선이지만, 이마저도 탄핵 정국과 맞물려 의사결정이 부재해 난처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날 헌법재판소는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인용했다. 이에 따라 윤 대통령은 파면되고 60일 내 조기 대선이 시작된다. 정치적 불확실성이 어느 정도 해소되면 LP들이 다시 시장에 나설 것이란 기대감도 있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지난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에도 해외 LP들의 출자가 사실상 중단됐던 경험이 있다. 당시 상당수 해외 출자자들은 국내 운용사(GP)에 대한 출자 사업을 멈추거나 상당 기간 지연했다. 정권이 교체된 이후에도 정부의 투자 시장에 대한 명확한 방향성이 제시되기 전까지는 해외 투자가 원활하지 않았다.
결국 대기업들의 부동산 유동화 계획은 탄핵 결정 이후의 시장 상황에 따라 크게 좌우될 전망이다. 정치적 불확실성이 일부 해소되면서 연기금과 공제회가 투자에 나설지, 아니면 조기 대선으로 인한 또 다른 불확실성을 이유로 관망세를 유지할지가 관건이다.
한 시중은행 부동산금융 팀장은 "인사동 일대 PF 사업을 추진 중인데, 탄핵 정국과 맞물려 약 3개월간 진행이 거의 중단됐다"며 "탄핵 결정으로 불확실성은 일부 해소됐지만, 투자심의위원회 승인을 받으려면 기관들로부터 셀다운 확약을 받아와야 하는데 이것이 당장 가능할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