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판 경쟁과 대의명분 위한 신평사 세미나·리포트 증가
연구원들 "이슈 발생 시 보고서 작성 압박 늘었다"
큰 의미 없는 리포트가 늘어나고 있다는 지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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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평가사들이 경쟁적으로 리포트를 작성하면서 업무가 늘어난 연구원들의 피로감 호소가 연일 커지고 있다. 동시에 '경쟁을 위한 경쟁'에 얽매여 의미 없는 보고서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국내 신용평가사는 한국기업평가, 한국신용평가, NICE신용평가 등 3개사가 과점 체제 하에서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다. 2015년 대우조선해양 사태와 관련해 신용평가사들이 뒤늦게 등급을 하향 조정하는 등 '뒷북 평가'라는 비판이 이어지자, 시장 신뢰 회복을 위해 시작됐던 평판 경쟁이 계속되고 있다.
신용평가사들은 시장과의 소통을 강화하는 한편, 등급조정에 앞서 신호를 주기 위해 세미나 개최 및 리포트 발행을 늘리고 있다. 외부 활동과 채널을 늘리려는 신평사의 노력이 계속되면서, 업무량이 늘어난 연구원들에게서는 갈수록 업무 과중이 심해지고 있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체감상 비정기적 리포트 양이 과거 대비 2~3배는 늘어난 것 같다는 평이다.
한 신평사 연구원은 "3개사의 경쟁으로 인해 어느 한 쪽이 내면 다른 쪽도 내야 해서 업무가 늘어나고 있다"면서 "시장에서 무슨 이슈가 생기면, 회사에서 관련 리포트를 빨리 쓰라는 압박이 있다"고 말했다.
비슷한 주제의 세미나도 잇따라 개최하며 시장의 관심을 끌기 위한 노력도 가중되는 모습이다. 지난달 한기평에 이어 이달 나신평과 한신평까지 3사 모두 미국의 통상정책 및 관세의 영향을 다루는 세미나를 진행했다. 다른 신평사 연구원은 "세미나부터 관련 리포트까지 먼저 알리고 다녀야 해서 힘들다"면서 사실상 반영업과 다를 바 없다고 전했다.
신평사들이 경쟁적으로 보고서를 내놓고는 있지만, 동시에 의미 없는 보고서도 늘어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충분히 다룰 만한 이슈지만 막상 읽어보면 내용에 알맹이가 없다는 지적이다.
일례로 한국신용평가는 이달 '사모펀드의 경영참여 확대로 부각되는 신용도 점검 항목'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냈다. 해당 보고서는 홈플러스 사태에 대한 시장의 큰 관심을 반영하듯 2200회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사모펀드의 가치제고 노력을 통한 투자대상의 펀더멘탈 제고가 선행돼야 사모펀드 투자자와 투자대상 채권자가 윈윈(win-win)할 수 있다"는 등의 원론적인 내용에 그쳐 아쉬움을 사기도 했다.
한 신평사 관계자는 "모든 회사가 좋은 보고서를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서도 "가치 있는 정보를 쓰는데 집중해야 하는데, 종종 큰 의미 없는 보고서를 쓰는데 힘을 빼는 경우가 있다"고 짚었다.
한 증권사 크레딧 애널리스트는 "신평사가 적극적으로 리포트를 내는 기조다 보니 신평사 연구원들이 굉장히 힘들 것"이라면서도 "일부 리포트들은 적당히 건너뛰면서 보고 있다"고 에둘러 말했다.
분명하게 서술하지 않는 '신평사 어투'에 대한 지적도 나온다. 신평사들이 특정 이슈나 기업이 어떻게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 있어, 모호한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신평사는 일부 인정하면서도 어려움이 있다는 입장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명확하게 작성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최근 미국 관세 이슈처럼 불확실성이 높아 쓰는데 한계가 있는 경우가 있다"면서 "이렇게 쓸 바에는 차라리 내지 말자고 내부적으로 '커트'되는 경우도 적지 않게 있다"고 설명했다.
증권업계에선 과거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이 주로 다루던 이슈까지 신평사에서 다루고 있는 점에 대해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분위기다. 등급 방향성 등을 조금 더 명확하게 볼 수 있다는 점은 장점이지만, 신평사에서 모두 쓰다 보니 갈수록 쓸거리가 없어지고 있다는 농담 섞인 푸념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