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들,"AI로 2시간에 끝날 일을 왜 10시간 청구하나”
성과 기반·정액제 등 하이브리드 과금 모델 확산 조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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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인공지능)가 산업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자문사들의 기본 과금 방식인 ‘타임 차지’(시간 기준 과금 방식) 역시 변화를 맞고 있다. 반복적이고 정형화된 업무가 AI로 빠르게 대체되면서, 실제 투입 시간과 청구 시간 사이의 괴리에 대한 클라이언트들의 문제 제기도 커지고 있다.
이미 해외 대형 자문사들은 투입 시간보다는 결과(output)를 기준으로 한 과금 모델로 전환을 고려하고 있는 분위기다.
법무법인은 물론, 맥킨지·BCG·베인 등 글로벌 컨설팅펌, 딜로이트·EY·KPMG·PwC 등 회계법인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전문 자문사들은 타임 차지 방식으로 수수료를 산정한다. 업무에 투입된 시간에 직급별 단가를 곱해 청구하거나 내부 원가를 계산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실사(Due Diligence)나 행정 지원 업무 과정에서 문서 리뷰, 계약 분석, 재무 데이터 정리, 시장 리서치 등 반복 업무는 AI 도입 이후 빠르게 처리 가능해졌다. 과거에는 10시간이 걸리던 작업이 이제는 2~3시간 만에 완료되는 셈이다. 클라이언트 입장에서는 “우리가 AI로 직접 해보니 2시간이면 끝나는 일을 왜 여전히 10시간으로 청구하느냐”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 같은 변화 속에, 처음부터 ‘AI로 제작한 초안’을 제시한 뒤 추가적인 고도화 작업만 자문사에 요청하는 사례도 점차 늘고 있다. 단순 반복 업무는 클라이언트 측에서 처리한 뒤, 자문사에는 전략적 판단이나 고급 검토 등 고부가가치 작업만 맡기는 식이다.
고객들 역시 과금의 기준이 ‘얼마나 오래 일했는가’보다 ‘무엇을 성취했는가’로 옮겨가는 추세다. 한 대형 회계법인 관계자는 “벌써부터 일부 고객은 인력 투입 계획을 제시하면 ‘막내 직원은 제외해달라’고 요청해오기도 한다”며 “예상 가능한 반복 업무는 AI로 처리하고, 인력 투입 시간을 줄여달라는 요구”라고 전했다.
그는 이어 “AI는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고 생산성에도 기여하지만, 가장 본질적인 변화는 자문업의 수익 구조 자체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이라며 “앞으로는 자문사가 단순히 시간만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주는가’가 경쟁력의 핵심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법무법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문서 번역 등 일부 업무는 AI가 이미 ‘전문가 수준’에 도달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미 구글은 자사의 AI 모델인 제미나이(Gemini) 등을 활용해 법률 문서를 국문으로 직접 번역해 전달하고 있다. 과거에는 해외 고객이 영문 원문을 국내 로펌에 보내면, 이중언어 사용자인 외국변호사나 국내 변호사가 검토 및 번역에 함께 투입됐지만, 이제는 번역본 자체가 완성된 상태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한 대형 로펌 관계자는 “예전에는 간단한 계약서라도 기계 번역은 품질이 떨어져 사람이 반드시 손을 봐야 했다”며 “요즘은 AI가 번역한 문서가 너무 매끄러워 놀랄 정도인데, 수정할 부분이 거의 없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한편 AI 도입은 고객 입장에서 ‘불합리한 과금 관행’을 개선할 수 있는 계기로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사모펀드(PEF) 운용사들은 리서치와 실사 업무에서 AI 활용이 일반화돼 있다. 이 때문에 자문사에 기본적인 작업은 선행 처리한 뒤, 필요한 부분만 맡기는 식으로 요청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는 설명이다.
한 PEF 관계자는 “누가 봐도 주니어급 인력이 담당할 업무에 시니어 파트너 이름까지 청구서에 올라오는 경우가 있다”며 “아예 처음부터 핵심적인 부분만 자문 요청을 하면 그런 오해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흐름은 해외에서 이미 본격화되고 있다. 글로벌 로펌, 회계법인, 컨설팅펌들도 여전히 타임 차지를 핵심 과금 모델로 삼고 있지만, AI 도입과 더불어 클라이언트들의 비용 투명성 요구가 커지면서 과금 체계에 대한 재검토가 이뤄지고 있다. 특히 PEF, 스타트업, 빅테크 기업 등 ‘가성비’와 ROI(투자수익률)에 민감한 고객군을 중심으로 변화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글로벌 회계·컨설팅 그룹 PwC(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는 이에 대응해 성과 기반(success fee), 구독형(retainer), 고정 수수료(fixed-fee) 등을 혼합한 하이브리드 과금 모델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계 대형 로펌인 레이섬 앤 왓킨스(Latham & Watkins)도 문서 자동 리뷰, 표준 계약서 분석, 데이터 추출 등 반복 업무 전반에 AI 기반 자동화를 도입했으며, 이에 따라 기존 시간 기준 청구 방식에서 일부 고정 또는 성과 기반 과금 모델로의 전환을 고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