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회장 부재 대비한 사업지원TF 체제 8년
경쟁사들은 앞서는데 삼성전자 경쟁력은 후진
재무통 중심 결정에 엔지니어 인재들은 회사 떠나
이 회장 경영전면 복귀시 이사회 경영 자리잡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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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7년, 그룹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던 미래전략실(미전실)이 해체된 이후 삼성은 태스크포스(TF) 체제를 8년째 유지하고 있다. 애초에 취지는 이재용 회장의 사법 리스크, 그에 따른 오너 부재의 장기화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삼성전자의 사업지원TF, 삼성생명의 금융경쟁력제고TF, 삼성물산의 EPC경쟁력강화 TF 등 사업 영역별로 나뉘어져있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삼성전자 사업지원TF가 그룹 미전실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게 정설이다.
17일 대법원 무죄 선고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그 지긋지긋한 사법 리스크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됐다. 당장 이 회장의 경영 전면 복귀와 리더십 강화, 그룹의 지배구조 및 컨트롤타워 변화라는 키워드가 자연스레 부상한다.
그리고 이제는 진지하게 삼성전자 사업지원TF의 명암과 존속 여부에 대해 고찰할 때가 됐다. 일각에선 TF가 유지돼야 한다고도 한다. 경영 환경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그룹 차원의 시너지 창출을 위해선 일정 수준의 컨트롤 타워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지금까지 사업지원TF에 대한 안팎의 여론을, 그리고 이사회 중심 경영으로 가고 있는 재계의 트렌드를 생각하면 TF의 수명은 이제 다하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업지원TF는 흔히 조선시대 비변사(備邊司)와 비교된다. 중종 때 왜구와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임시 군사 대책 기구로 설치된 비변사는 초기엔 국방 및 군사에 관한 긴급 사안에 대처해왔다. 그런데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그 기능은 비약적으로 확대됐고, 단순한 군사 기구가 아닌 국정 전반을 총괄하는 최고 의결 기구가 됐다.
임시 기구에서 출발해 상설 기구로 정착된 비변사는 조선 후기에는 의정부를 대신해 국정 전반을 총괄하는 실질적인 최고 관청으로 기능했다. 붕당 정치와 맞물려 특정 가문의 권력 유지 수단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막강한 권한을 앞세워 의정부와 6조 중심의 전통적인 국가 행정 체계를 문란하게 만들면서 왕권 약화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왕권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폐지시켰지만 이미 조선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쇠퇴했고 결국 나라를 빼앗겼다.
삼성전자 사업지원TF도 그룹의 지배구조 개편 및 효율적 경영 조율이라는 취지는 분명했다. 어느새 계열사 주요 이슈 조율, M&A 및 투자 결정 지원, 미래 전략 수립, 인사 조율이라는 그룹 경영 전반을 총괄하게 됐다. 삼성그룹이 이사회 중심의 투명한 의사결정을 표방하고는 있지만 TF의 실질적 영향력은 막강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법적으로는 보조 기구의 성격을 지닌 임시 조직인데 말이다.
사업지원TF는 삼성전자라는 특정 계열사 소속이면서도 그룹 전체의 주요 의사결정을 사실상 주도한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나왔다. 정작 법적인 의사결정 권한은 또 각 계열사의 이사회에 있다. 특정 사업의 실패나 문제가 발생하면 사업지원TF의 명확한 법적 책임 소재를 묻기 어렵다. "실질적인 의사결정권은 있으나 법적 책임은 지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때문에 당초 이재용 회장이 약속했던 각 계열사의 이사회 중심 경영은 유명무실해졌다.
사실 더 심각한 문제는 외부보다 내부에서의 TF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더 커졌다는 거다. '세계 1등'이라는 달콤함에 빠져있던 삼성전자는 TF 체제 8년 동안 후진, 또 후진했다. 삼성전자와 그룹은 야구의 삼성 라이온즈가 하위권을 맴돌고 축구의 수원삼성 블루윙스가 2부 리그로 떨어진 것처럼 패배 의식에 젖어들었다. 유능한 인재들은 경쟁사로 넘어가거나 미국으로 건너갔고, 다시 돌아올 생각은 없어 보인다.
매출과 영업이익 등 숫자 관리에 강점을 보이는 재무관리통들이 자리를 차지한 사업지원TF가 첨단기술 개발 분야 엔지니어들의 의욕을 꺾는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과거에 그룹장 수준에서 결정이 이뤄진 연구개발 건들이 지금은 TF의 C레벨 사장, 부회장까지 단계별 결재 보고를 받아야했고, 이마저도 쉽지 않다. 사업지원TF 보고를 올리려면 복잡한 사업 내용을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맞춰 보고서를 적어내야 한다는 에피소드를 들으면 마냥 웃을 수 없다. 글로벌 경쟁사들이 하루 하루를 쪼개가며 혁신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말이다. 이젠 SK하이닉스에도 뒤쳐진 삼성전자, "이건희 선대 회장이 계셨다면 이 상황을 그대로 지켜보셨겠냐"는 얘기가 계속 나올 수밖에 없다.
효율성을 이유로 사업지원TF라는 특정 소수 인력이 그룹의 모든 현안과 오너 경영인 관련 이슈를 다루기엔 그룹의 사이즈가 커도 너무 크다. 각 사업 분야의 심층적 전문성은 날로 부족해지고 급변하는 시장 환경에 대한 민첩한 대응을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특정 인력에 의한 판단이 그룹 전체의 방향을 결정하는 셈인데 좋지 않은 쪽으로 편향될 위험도 배제할 수 없다. 기업 내부의 비공식적인 성격이 강한 조직인만큼 외부 주주나 투자자들의 통제나 견제를 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기업 지배구조 투명성 논란으로 이어지고, 지금까지 삼성그룹과 이재용 회장을 사법 리스크 굴레에 빠뜨린 원인이기도 하다.
"내가 자리에 있는 동안만큼은 큰 사고가 나면 안된다"라는 재무중심적 사고 방식으로는 '제일주의'를 표방했던 삼성, '기술의 삼성'으로 되돌아가기 어렵다. 이제는 한 발자국 뒤쳐지면 그걸 따라잡기 위해선 얼마의 시간과 돈을 들여야할지 헤아릴 수도 없다. 엔지니어들을 대변해줄 수 있는 '올드보이' 전영현 부회장이 돌아왔고 반도체를 넘어 회사의 단독대표가 됐다. 하지만 정현호 부회장의 사업지원TF 존재감은 여전히 굳건했다. 정 부회장을 위시한 사업지원TF의 소위 '재무전문가'들은 작금의 상황을, 또 자신들의 업무 능력을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할 따름이다.
돌고 돌아 이재용 회장은 자유의 몸이 됐다. 그가 그룹 경영에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 그리고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인생을 바칠지는 아무도 모른다. 본인만 알거나 아니면 '인생무상'하니 알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에 정말로 이 회장이 삼성그룹을 다시 일으켜 세울 각오를 했다면 이젠 비상식적이고 전근대적인 '사업지원TF'라는 시스템과는 이별을 고할 때다. 역사적으로 봐도 특정 시스템이 강력한 의사결정과 조율 권한을 장기적으로 유지하면 끝이 좋지 않다. 국민 다수는 삼성이 이렇게 무너지길 바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