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자산 2단계 입법안 수개월째 공회전…유력했던 '10월 발표' 계획 '무산'
비트코인 한 달 새 30% 급락·보안 사고 이어지며 '투자자 보호' 기조 강화
STO는 속도…현물 ETF·스테이블코인엔 "구체적 로드맵 제시" 업계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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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국내 가상자산 제도화 논의가 예상보다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당초 10월 예정이었던 가상자산(디지털자산) 제도화의 핵심인 '2단계 입법'은 수개월째 표류 중이다. 가상자산 현물 상장지수펀드(ETF) 도입은 내년에도 불투명하고, 스테이블코인 도입엔 아예 '최소 2년 이상이 걸릴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가상자산 활성화'라는 정책 방향 자체가 후퇴한 것은 아니지만, 정부와 정치권이 '속도'보다 '안전'을 우선순위에 두는 쪽으로 기조를 명확히 조정한 분위기다.
4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최근 가상자산 가격 변동성이 최근 크게 확대되고 국내외 보안 사고가 이어지면서 정치권에선 가상자산 제도 도입의 속도와 적용 범위를 조절하는 문제가 정책 판단의 핵심 기준으로 떠올랐다.
코인베이스 시세 기준 비트코인은 지난 10월 6일 사상 최고치(12만6210달러)를 기록한 뒤 현재까지 30% 이상 하락했다. 최근에는 국내 최대 가상자산 거래소인 업비트에서 약 540억 원 규모의 가상자산이 해킹으로 탈취되는 보안 사고까지 발생했다.
이에 당국 내부에서는 "이 정도 변동성과 사고 전례를 고려하면 투자자 보호를 우선할 수밖에 없다"는 기류가 더욱 강해졌다는 후문이다.
여당 한 관계자는 "가상자산 제도화는 여전히 변함없는 정책 의제"라면서도 "다만 비트코인 현물 ETF나 스테이블코인처럼 도입 이후 되돌리기 어려운 제도는 투자자 보호와 시스템 리스크 점검이 선행돼야 한다는 당내 공감대가 분명하다"고 말했다.
당초 대선 공약으로 언급됐던 비트코인 현물 ETF 역시 가격 변동성 외에 커스터디(수탁) 체계의 설정과 운용, 금융사고 발생 시 책임 소재, 내부통제 체계 등 기존 증권상품과는 결이 다른 위험을 함께 안고 있어 정책적 고민이 깊어졌다는 설명이다. 실물 기반 자산을 직접 보유해야 하는 구조적 특성상 투자자 보호를 위한 커스터디 기술과 감독 체계가 충분히 검증되지 않으면 제도 도입 자체가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게 당국의 시각이다.
스테이블코인은 제도화 난도가 더 높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비트코인처럼 단순 투자상품이 아니라 하나의 통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만큼, 결제·송금·외환 관리·통화 주권 등 금융 시스템 전반과 직결된다. 금융위원회뿐 아닌 한국은행까지 직접 관여하는 구조라 정책 변수 조정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판단이다.
이 때문에 정치권에선 스테이블코인의 상용화 시점은 빠르면 2027년 하반기, 현실적으로는 2028년 이후로 점쳐진다. 디지털자산기본법 제정, 후속 시행령·감독규정 마련, 인프라 구축까지 고려하면 최소 2년 이상의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는 게 정치권과 시장의 공통된 전망이다.
그나마 토큰증권(STO)은 상대적으로 속도를 유지하고 있다.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소위를 통과한 전자증권법·자본시장법 개정안이 연내 처리될 가능성이 거론된다.
STO는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하지만 기초자산이 명확한 증권으로 규율되고 가격 변동성이 가상자산에 비해 제한적이어서 당국 부담이 적다는 평가다. 시장에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가상자산과는 달리, 규율과 통제 가능한 혁신부터 먼저 열겠다는 '정책적 선택'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토큰증권의 제도권 편입이 가시화됐지만 금융투자업계의 체감은 복잡하다. 가상자산 현물 ETF 입법 지연으로 가상자상에 대한 직접적인 투자 접근이 여전히 막힌 상황이기 때문이다. 현재 금융 당국의 유권해석에 따라 국내 가사장산 현물 ETF는 물론 해외 상장 현물 ETF 중개도 차단됐고, 마이크로스트래티지·코인베이스 같은 가상자산 관련 기업을 ETF에 편입하는 것 역시 제한적이다.
이 때문에 업계는 재간접 ETF나 가상자산 EMP(ETF Managed Portfolio) 공모펀드를 현실적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해외 상장 현물 ETF를 편입하거나 가상자산 관련 ETF에 금·채권 등 전통 자산을 혼합해 변동성을 낮추는 방식이다. 법 개정 없이 금융당국의 행정적 판단만으로도 허용 가능하다는 점에서 침체된 공모펀드 시장에 숨통을 틔울 수 있다는 기대도 나온다.
일각에서는 정책과 시장 간 시차가 더 크게 벌어진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해외에서는 이미 가상자산 현물 ETF가 활발히 거래되고 있고, 스테이블코인 기반 결제·송금 모델도 확산 중이다. 이에 국내 주요 금융사들 역시 미국·유럽의 커스터디·보안·외국인 결제 인프라 등을 참고해 태스크포스를 가동하며 물밑 준비를 강화하고 있다.
업계는 정부의 신중한 접근 자체는 이해하지만, 속도를 늦추더라도 '명확한 방향과 단계'를 제시해 달라는 입장이다.
최근 극대화된 가상자산 변동성과 해킹 등 보안 사고를 감안하면 당국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거란 점에 대해서는 공감대가 형성되는 분위기다. 다만, 제도 도입이 늦어지며 국내 금융사들이 이미 사업을 진행 중인 해외 금융사들에 밀려 도태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비트코인 현물 ETF나 스테이블코인 등을 한 번에 열기 어렵다면 재간접·혼합형 등 위험이 낮은 단계부터 명확한 로드맵을 제시해야 한다"며 "속도조절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제도화와 관련된 가시적인 다음 단계를 보여주는 게 시장 신뢰를 지키는 관건"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