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난 우려 속 반도체 증설러시 겹악재
한전 없이 그리드 구축 불가…민자도 한계
산업부→기후부 이관하며 정책 혼선 가중
"인프라 가시성 없이는 GPU 달라 말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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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작년 11월 방한해 한국 정부와 삼성·SK·현대차·네이버 등 기업에 그래픽처리장치(GPU) 26만장 공급을 약속했다. 인공지능(AI) 경쟁에 뛰어들 연산 자원을 적기 확보했다는 기대감이 상당했는데, 정작 재계를 비롯해 인프라업계에선 전력난 걱정이 앞서는 상황이다.
지난 14일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신규 원자력 발전소 건설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AI는 물론 반도체 역시 막대한 전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당장 전력 공급을 준비하지 않으면 10년, 15년 뒤에는 전력이 부족해질 수 있다는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실제로는 이미 전력난으로 사업 계획에 차질이 발생하는 상황으로 확인된다.
인프라업계 한 관계자는 "3~4년 전부터 기존 데이터센터(DC) 프로젝트도 그리드(전력망) 구축이 쉽지 않았다. 근데 갑자기 전력 수요만 불어난 상황"이라며 "글로벌 메모리 공급난으로 용인 클러스터를 비롯해 팹(Fab) 증설 러시가 본격화하며 정부도 우선순위를 따져보고 있다. 한국전력 승인을 못 받으면 DC 프로젝트는 즉시 중단된다"라고 설명했다.
엔비디아로부터 GPU 구매 계약을 확보했어도 당장 전력난 때문에 진척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구체적으로는 2023년 3월부터 시행된 전기사업법 시행령 일부 개정안부터 짚어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당시 산업통상자원부는 수도권에 집중된 데이터센터의 지방 분산을 위해 전기를 대량으로 사용하는 사업장에 전력 공급을 거부할 수 있도록 시행령을 개정했다. 5MW 이상 대규모 전력 사용 시설은 한전으로부터 ▲전력 계통 영향 평가를 받아야 하고 ▲승인이 없으면 진행 중인 DC 프로젝트까지 소급해서 법적으로 막을 수 있게 된 것이다. AI DC 캠퍼스는 최소 40~50MW급에서 시작한다. 사실상 대규모 AI DC는 전력 확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사업 착수가 불가능한 구조다.
한국데이터센터연합회(KDCC) 등 민간에서 개정안 기준이 추상적이라 법적 예측 가능성이 떨어지고, 진행 중인 프로젝트까지 전력 공급을 거부할 경우 손실이 막대해진다는 등 의견을 제기했지만 유의미하게 반영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현 정부 들어 분산 특구 지정, 직접 구매(PPA) 등 보완 입법을 추진하고는 있다. 그러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대규모 팹 증설 수요까지 겹치면서 이마저도 부족하다는 판단이 나오는 것이다.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팹 증설은 글로벌 안보·지정학 차원에서 논의되는 사안이고, 세수나 경제성장률 등 국가 경제와도 직결된 사안"이라며 "소버린 AI 프로젝트라면 모르겠지만, 개별 DC 프로젝트는 전력 공급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한전이 늘어날 전력 수요 전체를 책임지기에는 자본력과 시간 모두 부족하다. 새로 발전소를 짓는 데 필요한 물리적 시간도 부족하지만, 보상부터 개발까지 전 과정을 감당할 재무 여력이 없다는 얘기다. 3년 전 전력 공급을 거부해 DC 프로젝트를 중단할 수 있게 시행령을 개정한 것부터가 한전 재무위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당시 한전은 왜곡된 전기요금 체계로 천문학적인 적자를 기록하며 30조원 이상의 부채를 떠안아야 했다.
SK그룹처럼 자체 AI DC 디벨로퍼 구상을 내세워 일찌감치 민자발전에 힘을 싣는 기업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부 조직개편 후폭풍이 발목을 잡고 있다. 전력 공급 안정성과 효율성을 관리하는 기능이 산업부에서 기후에너지환경부 소관으로 넘어가면서다. 산업계 전반의 전력난을 단기간에 해소하려면 안정성과 사업성이 비교적 검증된 화석연료 기반 민자발전이 현실적 대안으로 꼽히지만, 주무부처가 바뀌면서 환경 등 새로운 판단 기준이 정책 결정에 개입하기 시작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계 한 관계자는 "정부 조직개편 이후 에너지위원회에 환경 전문가들이 들어선 뒤로 기존 위원들이 크게 걱정을 하고 있다"라며 "분산 특구 지정에서 신재생 에너지 등이 우선 결정되고 울산이 빠지는 등 결정들을 지켜보면 전력난 문제를 관리할 컨트롤타워가 없는 형국"이라고 토로했다.
이 같은 난맥상을 감안하면 당장 엔비디아에 GPU 공급을 요청하기도 쉽지 않은 분위기다. 국내에서 미국 하이퍼스케일러처럼 자체 AI DC용 전력 그리드를 구축하는 방식은 비용 부담이 커 사업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분석이 많다. 최소한 일부라도 한전 공급망을 활용하지 않으면 초기 사업 계획 수립 자체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엔비디아 입장에서도 주력 고객사와 각국 정부 주문이 밀려 있어 공급 우선순위를 가릴 수밖에 없다. 전력 확보 등 인프라 가시성이 떨어지는 프로젝트나 국가는 GPU 공급에서도 후순위로 밀릴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