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무브'로 체급 커진 증권사...상품도, 전략도, 리더십도 사라진 은행
입력 2026.02.12 07:00
    은행 요구불예금 한달 새 22조원 감소...퇴직연금도 증권사 강세
    예대금리 낮췄지만 자금 유출 못 막았다...'단기적 현상 아냐'
    인사ㆍ전략ㆍ재무 출신 은행 CEO들 '영업 야성' 사라졌다 지적도
    "은행 창구서 팔 상품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고객 이탈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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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AI 생성 이미지(편집)

      은행 요구불예금은 올해 들어 한 달만에 지난 연말 대비 22조원 감소했다. 같은 기간 증권사 투자자 예탁금은 19조원 증가했다. 2월 들어서도 은행 요구불예금은 10조원 가까이 감소했는데, 증권사 투자자 예탁금은 10조원 증가하며 사상 최초로 110조원을 돌파하기도 했다.

      장기 자금이 묶이는 퇴직연금 시장의 변화는 더욱 드라마틱하다. 국내 퇴직연금 총 적립액은 2024년말 427조원에서 496조원으로 69조원 증가했는데, 이 중 27조원이 증권사로 향했다. 2년 전 대비 114%나 늘어난 규모다. 같은 기간 은행 적립금은 27조원에서 34조원으로 28% 성장하는 데 그쳤다.

      한국투자증권은 지난해 증권업 사상 최초로 연간 당기순이익 2조원을 달성했다. 12조원의 자본으로 105조의 자산을 굴려 올린 성과다. 같은 기간 한국투자증권의 5배인 500조원의 자산을 운용하는 우리은행은 2조6000억원의 순익을 냈다. 증권가에서는 한국투자증권은 향후 2~3년 내에 순이익 3조원에 도달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은행에서 증권사로, 자금의 대이동 '머니무브'가 본격화하고 있다. 이전에도 경기가 좋을 땐 증권사에 자금이 몰리고 나쁠 땐 은행으로 자금이 돌아오는 현상이 관측되곤 했지만, 이번 싸이클은 기존의 현상과는 성질이 완전히 다르다는 평가가 많다.

      체급이 커진 증권사들은 은행을 '제로섬 게임'의 결투장으로 끌어냈다. 은행들은 지난 수년간의 초호황에 젖어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영업 현장에서 난전(亂戰)이 벌어지는 가운데, 리더십의 격차 역시 극명해지고 있다. 현장을 아는 리더가 있는지, 그 리더들이 어떤 의사결정을 내릴지가 향후 수 년간 자본시장의 방향성을 가를 변수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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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일 은행권에 따르면 1월말 기준 5대 시중은행 예대금리차 평균은 1.20%대 초반이 될 것으로 점쳐진다. 지난해 8월 1.522%였던 예대금리차 평균치가 불과 반 년만에 30bp(0.3%포인트) 가까이 축소되는 것이다. 이 기간 기준금리는 2.5%로 변동이 없었고, 대출의 기준이 되는 금융채 등 시중금리는 급등한 것을 고려하면 이례적 상황이었다.

      예대금리차가 축소된 건 은행들이 대출금리보다 예금금리를 더 많이 올렸기 때문이다. 지난해 하반기 증시가 호조를 보인데다, 원금보장형 실적배당 상품인 종합투자계좌(IMA)가 출시되며 유동자금이 이탈할 조짐이 보이자 선제적으로 '고객 단속'에 나선 것이다.

      결과만 놓고 보면 이 고객 단속은 실패했다. 지난해 12월 IMA 판매 시작과 함께 은행 저축성예금이 크게 줄었고, 올해 들어선 증시가 사상최고치를 잇따라 갈아치우며 유동자금인 요구불예금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한 은행 관계자는 "부동산에 이어 증시까지 자산 가격이 꿈틀거리며 목표 수익률에 대한 고객들의 눈높이가 확실히 높아졌다"며 "이전의 금융사고로 인해 은행은 주가연계증권(ELS) 등 중위험 중수익 상품군을 취급하기 어려워지며 대응이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영업 현장의 체감이 가장 큰 분야는 장기 자금인 퇴직연금이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신규 퇴직연금 적립 자금 중 은행이 60, 증권은 30, 보험이 10을 가져갔다. 지난해엔 이 비율이 은행 50, 증권 40으로 바뀌었다. 증권의 퇴직연금 성장속도가 은행의 4배에 달하는 점을 고려하면, 5년 후엔 총 적립금 기준으로 증권이 은행을 추월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문제는 증권사로의 자금 이동이 가시화한 가운데 은행의 전략적 대응책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지난 2017년 코스닥 붐(boom) 때만 해도 은행들은 프라이빗뱅커(PB) 채널을 통해 코스닥에 투자하는 특정금전신탁 상품을 공격적으로 판매했다. 지금도 일부 은행 PB센터에 관련 신탁 상품을 취급하고 있지만, 고객들의 수요에 대응하는 수준에 그친다는 분석이다. 

      금(gold) 투자 붐의 수혜 역시 은행권과는 거리가 먼 상황이다. 한국투신운용에서 내놓은 ACE KRX금현물 ETF의 순자산액은 사상 최초로 지난해 11월 3조원을 돌파한 데 이어 최근 5조원에 육박하고 있다. 금에 투자하는 방법이 ▲금 실물 매입 ▲금 현물 ETF 매수 ▲금 선물 ETF 매수 정도밖에 없다보니, 투자 자금이 은행에서 빠져나와 금거래소나 증권사로 향할 수밖에 없는 구조란 지적이다.

      그나마 지난해 하나은행이 금 현물 신탁 상품을 내놓으며 체면치레를 했다는 평가다. 하나은행이 11월 초 판매한 40억원 한도 금 신탁 상품은 반나절만에 완판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은행 영업 현장에서는 '금 신탁'이 은행의 신뢰도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맞춤형 상품'인데도 불구, 당장 권유할만한 상품이 없다는 점에 답답함을 호소하고 있다.

      이는 결국 '리더십'의 문제로 이어진다는 분석이다. 일각에서는 현 대형 금융지주 회장 및 은행장 등 최고경영자(CEO)들이 영업보다는 주로 인사ㆍ재무ㆍ전략 출신들로 채워져 있는 데서 원인을 찾는 목소리가 나온다. 코로나 사태 이후 양적완화와 함께 자산 규모가 크게 늘어나며 예대마진만으로 사상 최대 이익을 매년 경신하다보니, '영업 야성'이 사라졌다는 지적도 이어진다.

      물론 은행들도 억울한 부분이 없지 않다. 파생결합펀드(DLF)와 주가연계증권(ELS) 판매 중단으로 인해 중위험 중수익 상품의 공백이 길어지고 있다. 지배구조 및 자본 규제가 빡빡해지는 가운데 주주들의 환원 요구는 거세지고 있다. 경기 침체 장기화 및 현 정부의 정책적 안배로 인해 대출의 부실화는 현재진행형인데, 이에 대한 부담은 은행이 감내해야 하는 구조가 정착됐다.

      그럼에도 불구, DLF 사태 등 금융사고는 결국 은행의 관리 역량 부족해서 비롯했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코스닥 신탁 상품 역시 2018년 코스닥 급락 당시 '신탁'임에도 불구, 은행들이 관리는 나몰라라 했다는 비판이 많았다. 코로나 이후 증권 투자 경험자가 늘어나며 증권사 고객 기반이 확장됐지만, 은행들은 증권사와 상품으로 경쟁하기보단 '법인 지급결제'의 울타리 속에서 안주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다른 금융권 관계자는 "올해 주요 금융회사 신년사 중 '머니 무브'와 '은행의 위기'를 제대로 짚은 건 영업통 출신인 함영주 하나금융 회장밖에 없었다"며 "인공지능(AI)이나 생산적 금융, 고객기반 확장 모두 중요한 이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은행 창구에서 팔 상품이 마땅치 않고, 이는 고객 이탈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